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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규원 Jun 02. 2023

 언젠가는 거두게 될까?

<골짜기의 백합> 오노레 드 발자크

"····· 물 없는 우물이 되지 말고 정신과 형식을 동시에 갖춰요! 그러면 바람결에

버린 것으로 생각되었던 씨앗의 열매를 언젠가는 거두게 될 것이에요."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고 청년이 된 펠릭스는 사교계의 무도회에 나갔다가 젊고 아름다운 귀부인에게 매혹된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잔뜩 화를 내며 자리를 떠난 그녀를 잊지 못하고 헤매다가 앙드르강 골짜기의 저택에서

모르소프 백작 부인을 찾아낸다. 그녀를 다시 만나자 펠릭스는 구름 낀 회색빛 삶 속에 햇살처럼 비친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녀는 어두운 잎들 사이의 백합처럼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이었다. 말과 행동 속에 녹아든

우아한 진솔함은 엄청난 매력을 발산하는 육체적인 시심(詩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모르소프는 미친 듯이 분노를 터뜨리며 불만을 일삼는 위압적인 사람이다. 백작 부인은 병적일 정도로

성격이 비뚤어진 남편 때문에 시달린다. 그는 자신이 가르쳐 준 원리나 규칙을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핀잔을

퍼붓는 것을 즐기며 상대의 실수를 기다렸다는 듯이 나무라는 사람이다. 그녀는 그의 과민한 신경을 달랠 것을

찾아내기 위해 애썼다. 자주 언짢아지는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그의 잔소리와 독단적인 주장을 피력하는

것을 인내하며 들어주었다. 어떻든 그의 재능과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에 큰 인내심과 용기가 필요했던 세월을

견디었다. 사랑보다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와 함께 살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성은 연민을

느끼는 이들에게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그녀의 삶은 하나의 바위를 오를 때마다 또 건너야 하는 사막들과 같았다. 모든 것이 불협화음인 환경에

처하게 되면 맑은 영혼들은 더 끔찍하게 고통을 받는다. 반면 자신에게 친근한 생각이나 감정, 또는 사람을

만나면 황홀해지는 지경이 된다. 펠릭스도 처음 누군가의 가슴이 그에게 열리고 누군가의 귀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신뢰의 눈길이 스칠 때 잠시라도 기쁨을 온전히 맛볼 수 있었다. 앙리에트도 펠릭스와

비슷했다. 마치 호수에 던져진 돌이 그 표면과 깊은 속까지 똑같이 흔들어 놓듯이 둘 다 작은 충격에도

전체적으로 흔들리는 사람들이었다. 마치 사자의 먹이가 된 것처럼 좌절한 남자의 억눌린 광기와 독설 아래

꼼짝없이 잡히곤 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주위에는 '행복이 가득한 공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말라버린 내면의

눈물까지도 영원을 얻은 기분이 된다.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펠릭스 영혼에 그녀는 마치 풍부한 열매의

씨앗을 던져 주어 미지의 식물이 푸르게 자라고, 좋은 본성을 발달시키면서 나쁜 것들을 말라죽게 하는

태양과 같았다. 보이지 않는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듯이 힘을 재충전할 겨를 없이 탕진시키는 생활인데,

어떻게 그녀는 가족에게로 끊임없이 발산되는 영혼의 향기를 지닐 수 있었을까?

엄격한 가톨릭 교육을 받은 앙리에트는 다정하고 섬세한 마음을 지닌 펠릭스를 사랑하고 경제적인 면을

비롯해 사교계의 처세 및 그 밖의 온갖 원조를 아끼지 않지만 정절을 지킨다. 발자크도 어려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기숙학교로 보내졌다. 외롭고 고통스러운 성장 시기를 겪었고 청년시절 베르나 부인을

사랑했다고 하니 자전적 소설로 보인다. 이야기의 결말은 안타깝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며 자신을

돌보지 못한 앙리에트는 병약해져서 죽음을 앞두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이 위선적이었다고 고백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고 있는 것은 정신적인 사랑이 아니라 육체적인 사랑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황홀한 가운데 영혼을 하늘에까지 이끌고 가는"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해서 아쉬워하며 숨진다.


집안마다 견디기 힘든 불화를 숨기는데도 불구하고,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제각기 자연스러운 감정을 헤치는

깊숙하고 치유될 수 없는 상처들이 있다. 우리 아이들도 올무에 걸려들지 않도록 조심하며 마음을 압박하는

초조감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나도 한동안 좋건 싫건 동거인의 요구에 맞추는데 익숙해져서 당당하게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살았다. 나에게 모르소프 백작과 앙리에트 모두 실감 나는 인물들이 아닐 수 없다.  

십여 년 전 큰딸과 떠난 파리 여행에서 박물관과 미술관을 순례하며 내가 좋아하는 그림들을 실컷 보았다.

내 인생의 화양연화와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발자크에 대한 호감 때문에 그의 생가를 찾아갔다. 언덕아래로

내려가는 소박하고 한적한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파리 중심가에 귀족들이 살았던 구역의 빅토르 위고 빌라와

비교되었다. 변두리 언덕에 자리 잡은 작은 집에는 발자크가 소설 속에서 창조한 세계의 인물들 200여 명이

그려진 삽화와 함께 관계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설명되어 있었다. 그는 낭만주의 시인들에게 속물로 취급된

부르주아의 왕성한 생활력과 실행력을 사랑했다. 또 과학의 진보와 산업 발달의 공로를 높이 샀다. 그래서

바로 자신의 일부이기도 한 부르주아의 전형을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야심은 나폴레옹과 비슷한 것이었다. <인간 희극>에서 "예술의 목적은 자연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자연 그대로보다 더욱 크게 또한 명확하면서도 과도하게, 상세하면서도

서정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발자크는 어떤 전형을 현실 이상으로 과장함으로써 효과를 나타냈다.

커피로 잠을 쫓으며 밤새워 소설을 쓰고 침대 시트를 몸에 두른 채 아침을 맞던 모습이 로댕의 작품으로

남았다. 거대한 두상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채 오른편 위쪽을 바라보고 몸은 거칠고 시원스런 주름의

천 속에 가려져 있다. 숨겨진 신체를 암시하고 아우라를 부여해 준다. 열정적인 그의 내면세계는 물론 깊이 이해하고 생명을 준 여러 인간들의 모습이 실로 놀랍다.

진실은 단순하지 않고 항상 복잡한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소설이란 형식 속에서 확인하게 만들어 주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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