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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규원 Sep 03. 2023

'이상 없다'의 역설

<봄의 제전> 모드리스 액스타인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교실을 떠나 참호로 간 파울 보이머와 그의 동기생들의 경험을 묘사하지만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다. 활력과 국가적 대의로 무장하고 신념으로

충만한 젊은 병사들이 겪은 일상화된 살육과 헛된 죽음, 체념에 대한 성난 선언이자 분노였다.

 

“… 돌아간다 해도 우린 지치고 망가지고 소진되고 뿌리 뽑히고 희망도 없는 이들일 것이다.

 우린 더 이상 갈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2년에 걸친 사부전선의 교전국들은 수백만명의 목숨을 희생시켰지만 전선에서 어느 쪽 방향이든

기껏해야 1.5km 정도나 이동하는 것이었다. 병사들의 귀를 먹먹하게 만들고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집중 포격, 길게 한 줄로 늘어선 병사들이 진흙과 구덩이로 덮인 지형을 슬로모션처럼 가로질러 가다가

잘리지 않은 철조망, 기관총 세례, 수류탄과 맞닥뜨리는 모습 같은 전형적인 이미지가 바로 이 전투에서

온 것이다. 참호 속에서 끔찍한 추위와 궂은 날씨로 온몸이 얼어붙거나 젖은 채 견뎌야 했고 온갖 해중과

쥐들로 인해 잠시라도 잠을 잘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전선의 끔찍한 환경은 이해와 상상을 뛰어넘고 인간적인 생각과  느낌을 마비시켜 버렸다.

1차 대전에 참전하고 난 후 1928년에 비교적 짧은 집필 시간에 완성한 소설에서 레마르크는

사회가 정상적인 생활로 간주하는 것을 추구할 가능성을 전쟁이 산산조의 내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Lost Generation’은 1차 세계대전 후 사회에서 환멸감과 허무적 쾌락적 경향에 빠졌던

미국의 지식인 계층, 윌리엄 포크너와 피츠제럴드 등 작가들과 청년층이 인생의 의미를 잃고

방황한다는 의미로 붙여졌다고 알았다. 헤밍웨이가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의 서문에 파리에서

만난 거트루드 스타인의 “당신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의 사람들입니다.”라고 한 말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도 예술가들의 후원자로 널리 알려진 그녀가 차를 정비하러 갔다가 들었던 말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레마르크가 작품에서 자신의 세대야말로 진정으로 길 잃은 세대라는 주장을

가장 직접적이고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심지어 귀에 거슬릴 만큼 분명하게 제시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나도 80년대 초 우리나라의 현실을 겪으면서 삶의 목표를 한동안 상실했다가 다시 방향을 잡은

경험이 있다. 로스트제너레이션의 유래와 의미는 나 자신을 돌아보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1913년 프랑스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된 <봄의 제전> 공연은 도덕과 관습의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새로운 변화와 생명력을 가져다주는 예술의 힘을 확인시켜 주었다. 힌편 화가 지망생으로 재능이 없고 외톨이였던 히틀러는 전쟁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처음으로

훈장과 함께 인정받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시대 분위기가 너무 낯설고 광기스러울 따름인데 지성계와 예술계의 상당수가 나치즘과

제3 제국의 드라마에 사로잡힌 이유는 무엇인가? 이전의 아방가르드 운동은 부르주아의 불모성에

반발하고 삶을 끌어안았다. 위선적이고 점잖은 사회를 증오하면서 반기를 들었다. 모든 기존의 가치에

대한 급진적인 재평가를 도모한 시대정신은 볼셰비즘과 파시즘의 활력, 영웅주의, 에로티즘과 더불어

예술가와 지식인들에게 실제로 매우 강력한 조합을 제공했던 것이다. 전쟁은 곳곳에 만연한 참상과 처참한 살육에도 불구하고, 슬픔과 회한의 고통애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기분을 들뜨게 하는 경험이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기회이자 예술로서 인식한 히틀러에 동조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2차 세계대전은 불가피했다.


레마르크는 소설의 서문에 “고발도 고백도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비정한 사회질서와 파괴와 참상을

낳은 정치질서를 규탄하고 있다. 또한 인간다운 가치를 파괴하고 자비, 사랑, 유머, 아름다움,

개인성을 부인하는 기술과 기계문명도 고발한다.

더 이상 평화와 행복을 기대할 수 없는 삶에서 모든 불행의 근원이자 개인적인 좌절과 슬픔, 불만의

열쇠를 전쟁에서 찾았고 대중들의 공감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전선의 독일 병사가 받은 고통과 모멸에서

대중은 그 자신의 그림자를 봤고 자신들의 익명성 그리고 안정에 대한 희구를 감지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소설이 환기시켜 주는 진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 출판되어 하루아침에 그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었지만 불안하고 불행한 삶에서

건져주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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