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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규원 Sep 26. 2023

당신은 나의 심장

<개선문> 레마르크

그림을 좋아하거나 고흐를 애정하는 사람들은 연한 초록 색상을 띠는 압생트를 기억한다. 고흐가 남긴

'압생트'라는 작품 속 창가의 테이블 샴페인 잔에 담긴 술이 청량감을 준다. 그가 술을 마실 당시에는

환각상태를 만드는 테레벤이라는 물질이 포함되어 있어서 고갱과의 불화로 자신의 귀를 자르게 됐다는

설도 있다. 중독성이 강한 독주로 원산지는 스위스인데 로트렉, 드가, 랭보 등 예술가들이 애호했다.

고흐는 아버지가 개신교 목사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자신도 목사가 되고 싶었으나 너무 열정적인

성향이 걸림돌이었다. 생업에 바쁜 사람들을 찾아다닌 것이 교회에 부담을 주었다. 전도사 역할을

접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기에 그림을 통해서도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술을 즐겨 마셨더라도 중독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림 작업은 집중력이 필요한 고된 일이고, 온전한

정신을 가져야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 <개선문>을 떠올릴 때면 '칼바도스'가 먼저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 주인공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칼바도스는 라비크에게 영혼과 같다. 절망과 공포, 허무와 고독에 내던져진 그를 지탱해 주는 친구와 같은

존재다. 노르망디 지방에서 많이 나는 사과로 만든 비교적 값싼 브랜디를 라비크는 한두 잔 들이켜는 게

아니라 거의 몸을 절이다시피 한다.

따뜻한 인간성과 예리한 감수성을 지닌 라비크는 게슈타포의 추적을 피하려는 친구들을 숨겨줬다가

고문당한 뒤 강제수용소로 갔고 가까스로 탈출했다. 그런데 게슈타포 하케의 고문 수사로 애인(시빌)을

잃게 되었으니 살아있는 게 아니었다. 유능한 외과 의사인데 나치스에 쫓겨 무면허 의사로 생계를 잇고 언제 추방될지 모르는 떠돌이 신세였다. 그가 살아남은 자로 사는 이유는 하케에게 복수를 하려는 것뿐이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로 세계적인 작가가 된 레마르크의 책은 금서가 되고 불살라졌다. 그는 다시 전쟁을

부추기는 나치가 정권을 잡기 직전 스위스로 이주했다. 반전주의자로 전쟁의 비정함과 전쟁을 겪은 인간,

개인의 내면과 심리를 깊이 있게 다루었는데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The death of one is a tragedy, the death of a million is just a statistic."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피난민들로 풍전등화지만, 파리는 새로운 시대를 앞두고 빛난다." 추방을

두려워하며 신분을 숨기고 어두운 바에 모인 사람들은 담배와 술과 노름으로 밤을 지새운다. 파리 뒷골목

개선문 근처 싸구려 호텔에서 시니컬한 라비크도 이름을 바꿔가며 망명자의 삶을 살아간다. 그가 비 오는

축축한 밤 세느 강의 알마교(橋) 거리에서 기절한 여성을 지나치지 못한다  삶을 포기하려 했던 공허한 눈빛의 의지할 곳 없는 가수 조앙 마두를 보살펴 주게 된다.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칼바도스로 인해 둘 사이가 맺어진다. 보드카를 마시다가 조앙이 말한다. 처음 만난 날 내게 준 술이 뭐냐고. 라비크가 코냑 아니었던가 하고 묻자 그녀는 다른 거라고, 그 술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못 찾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마셨던 술 중에 최고로 따스했다고 하면서 그걸 마셨던 술집 이야기를

하자 그제야 그는 말한다. 칼바도스였을 거라고. 노르망디 산 사과로 만든 화주(火酒)였다고.


"빛은 이런 목석같은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을 잊어버리고 언제까지나 오래

살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망각, 참으로 멋진 말이다. 그것은 공포와 위안과 망령으로 가득 차 있다. 망각이 없이 어찌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어느 누가 완전히 망각할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을 찢어 놓는 기억의 잔해, 더 이상

살아갈 목표를 잃어버렸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사랑이다. 이것도 역시 사랑인 것이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기적. 그것은 현실이라는 회색 하늘에 꿈의

무지개로 다리를 놓을 뿐만 아니라 거름 더미 위에도 낭만적인 빛을 쏟는 것이다. 기적이기도 하고 미친

조롱이기도 하다."


라비크는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질 준비가 된 조앙을 운명처럼 만난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어도 옛 상처를 안고 불안정한 상태를 벗어나기 힘든 상황에서 그녀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소설에 칼바도스만 나오는 게 아니다. 압생트, 와인과 샴페인, 코냑과 아르마냑, 보드카, 크램 드 망트 등이

있지만 라비크는 거의 칼바도스를 마신다. 조앙과 헤어진 뒤 친구가 칼바도스를 권한 때를 빼고는.

그는 말한다. 칼바도스는 곤란하다고. 칼바도스는 그녀와 그, 둘의 술이라고. 그녀가 없으면 칼바도스를

마시지 않는다고.

안정된 삶을 찾아 떠난 조앙 때분에 멀어진 두 사람이 오랜만에 여자의 집에서 만났을 때 그녀가 칼바도스를

따라고 하는데 그는 싫다고 한다. 그들만의 술인 칼바도스를 그런 기분으로 마시고 싶지 않아서이다.

죽어가는 그녀를 붙들고 그가 울부짖는다. “당신은 그냥 돌멩이 같은 나를 살아있게 해 주었어. 조앙…!”

흑백 고전 영화에서 샤를 보와이에와 잉글리드 버그만의 연기가 아직도 매우 생생하다. 붉은색 칼바도스는

색깔도 그렇고 두 남녀의 마음을 불타오르게 할 것 같은 느낌을 간직한 낭만적인 술이다. 소설이 그린 영원한 사랑을 불러일으켜 줄 칼바도스 한잔 아니, 더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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