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올바른 방식
우리는 입으로만 말하는 게 아니다. 눈으로도 말한다. 남들이 알지 못하게 눈짓을
할 수 있다. 상대에 대한 호감 같은 속 마음은 말이 아니라 눈빛에 더 잘 나타나기도
한다. 급하거나 먼 거리에선 몸짓이 말할 것도 없이 유용하다. 그런데 의사소통의
도구인 입과 눈에는 '문'이 있다. 입술과 눈꺼풀이 있어서 열고 닫을 수 있다.
귀
-정현정-
입의 문
닫을 수 있고
눈의 문
닫을 수 있지만
귀는
문 없이
산다
귀와 귀 사이
생각이란
체 하나
걸어놓고
들어오는 말들 걸러내면서 산다.
왜? 가려서 보고 말하라고 '문'이 있다. 눈이 모든 인식의 통로이지만 생각에 따라,
관점의 차이에 의해서 같은 것을 달리 보기도 한다. 또 눈을 감으면 마음이 조용해져서
생각이 모아지기도 한다. 끔찍한 일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고 너무 큰 충격이나
인식의 혼란으로 말을 못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심한 과오를 범해서 주변에 피해를
주었을 때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처지가 된다. 말로 준 상처나 거짓말은
물리적 폭력 이상으로 치명적일 수 있다. 상대를 파멸시킬 수 있으니 입을 함부로
열면 안 되고 문자 폭탄(악플)을 날리는 손도 조심해야 한다.
반면 코와 귀는 문이 없다. 숨을 쉬지 않으면 죽으니까 생존과 직결된 코는 열려있다.
귀 역시 중요한 기능을 한다. 특히 포식자를 경계하는 초식동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인간은 자연의 모든 소리를 정신에 의해 포착하고 길들여 왔다. 소리는 사방으로
흩어지고 사라지지만 한계를 분명히 해 주는 정신 속에 남아있다. 무엇보다 인간에게
귀는 이해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일에 있어서 탁월한 기능을 한다. 성서에도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던 믿음의 조상과 예언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거룩할 성(聖)에도 귀(耳)가
들어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예수도 귀 있는 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했고, 바울도 믿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하였다.
말과 음악처럼 우리의 사고와 감정은 귀를 통해 쉽게 전달된다. 인간관계를 잘 맺으려면
대화를 나누고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데 귀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점점 사람들은
눈과 입으로 사는 경향이 커졌다. 시각을 상실한 보르헤스는 "청각과 후각 같은 존재의
어떤 영역은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는 공간이 시간 안에 속해 있는
것, 부수적 사건으로 보았다. '종말 직전 단계의 현실에 대한 견해' <영원성의 역사>에서
인간이라는 종 전체가 청각이나 촉각을 통해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른 감각들을 인지하는
능력과 그것이 규정되는 공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상을 밀고 나가면서 인류는
공간을 망각한 채 역사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이 일상인 요즘에 공간적 감각인 시각, 촉각, 미각이 소멸하더라도 열정적이고 또 절실하게
삶을 유지시켜 나갈 수 있을까? 보르헤스가 내다본 것과 너무나 다른 세상으로 변했다.
가루를 곱게 치거나 액체를 받을 때 쓰는 도구인 '체'는 바로 정신의 작용인 '생각'이다.
우리는 '들어오는 말들을 걸러내며'라는 거름장치를 지녀야 한다. 정신의 힘, 분별력을
지닌 생각이란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사람들을 이해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일에
있어서 주관성이 드러나는 눈과 입보다 '귀'의 역할이 커지려면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힘없는 자들의 작은 소리와 외로운 목소리, 우리 주변 사람과 자연의 고통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마음도 거기서 생긴다.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이기주의, 거짓과 위선적인 행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주변 사람들과 사물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바로 사랑하는 일이다. 올바른 생각과 진실한 말을 할 수 있기 위해, 무엇보다
사랑하기 위해서 소통의 방식을 달리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