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이미지' <나의 그림 읽기> 알베르토 망구엘
더위가 한풀 꺾이는 것 같아서 광주에 갔을 때 피카소 도예전(이건희 컬렉션)을 보았다. 어머니 집을
나와서 조금 걷다가 건널목만 건너면 되니까 산책 삼아 아시아 문화의 전당으로 갔다. 옛 도청과 분수대
광장을 그대로 두고 지하로 건축해서 너른 공간과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흔히 생각하듯 위로 솟은 웅장한
기념비적 건물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국제 공모전에서 당선된 재미 건축가 우규승 씨의
작품은 서울 부암동 김환기 미술관도 있다.
건물 외부로 넓은 경사지를 잔디밭으로 만든 하늘공원은 일찌감치 시민들의 걷기 운동과 힐링 공간으로
사랑받았다. 오랜만에 와보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콘크리트 건물 사이로 수풀이 우거져서 그늘이 생기고
사람들이 찾는 휴식 공간이 되어 있었다. 접근성이 좋고 무료 전시다 보니 주말에 가족 나들이로 맞춤인지라 전시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냥 유명세를 치르고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다.
세계의 명화로 '모나리자' 만큼 인구에 회자된 '게르니카'는 피카소를 가장 유명한 현대 화가로 만들었다.
폭력과 전쟁의 잔학성을 폭로한 작품으로 평론가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동물들, 학살당한 동물들이 보인다. 내게 있어서는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대중에게는 각자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피카소의 말대로 한눈에 알 수 있는 구체적인 표현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감성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작
(가로 7m 세로 3m) 그림이다. 그런데 피카소는 여성 편력이 심한 데다 여성을 짓밟는 잔인하고 무정한
남성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게르니카>로 평화와 반전의 메시지를 준 작가처럼 인식되는 것은 아이로니컬 하다.
그림에서 단순히 대상을 묘사하려는 화법이 의미가 없어진 것은 사진의 발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스페인에서 이른 나이에 두각을 나타낸 피카소는 파리로 와서 지신의 스타일을 모색하게 되었다. 3차원의
물체를 입체화법이라는 새로운 기하학적 방식으로 형상화한 것은 거의 50대에 이르러서였다. 그는 가장
독창적이고 대담하게 세계에 대한 구상력을 표현하고 에너지 넘치는 활동을 이어갔다.
그 배후에는 창작의 중요한 시기마다 등장하는 여인들이 있었다. 네 번째 여인 마리 테레즈 발테르처럼
지고지순한 여성의 사랑이 있었다. 17세에 30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 피카소를 만나 22세에 딸을 출산했는데 그 무렵 도라 마르라는 새 연인이 생겨서 불화를 겪었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초현실주의 사진작가인 도라 마르는 열정적이고 당찬 성격이라 피카소와 자주 다투었던 모양이다. 우울하고 예민한 성격의 그녀는 예술에 조예가 깊고 지적이었지만 조롱과 비난, 학대 행위의 대상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고통스러운 나머지 슬프게 울 때 옆에서 피카소는 노트를 꺼내어 연필로 스케치하곤 했다. 피카소는 일방적으로
사랑에 빠진 한 여성을 잔인하게 괴롭혀서 선량한 시민들의 고통과 슬픔을 표현할 수 있었다. 도라 마르의
울부짖는 초상화는 게르니카를 제작한 시기와 겹친다.
대상의 본질을 여러 측면의 조합으로 드러내는 듯한 피카소의 초상화에서 대부분 비뚤어지고 일그러뜨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 피카소가 그린 초상화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은 사람 얼굴 크기 정도의
<통곡하는 여인>(1937년 10월)이다. 두 눈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찢어져 있고 화면은 빨간색과 녹색, 보라색과 노란색, 오렌지색 등으로 칠해졌다. 뚝뚝 떨어지는 굵은 눈물을 흰 손수건으로 훔치는 손가락과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그림 속 여인은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고자 했음이 틀림없다. 예쁜
모자, 잘 빛은 머릿결에서 행복을 기대했던 그녀의 감정을 읽을 수 있지만 얼굴은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다.
한 여인의 고통과 분노가 분출해 낸 슬픔을 묘사한 이 그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그림에서 격한
감정을 느낄 수 있지만 뭔가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통곡하는 여인의 모티브가 없었다면 스페인 내전으로 학살된 양민들, 어린아이를 잃고 절규하는 모성을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폭풍처럼 덮쳐온 격정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우는 도라 마르의 모습이 아이를
잃고 슬퍼하는 어머니로 게르니카에 등장한다. 1937년 4월 28일 나치 공군 기가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
게르니카라는 작은 마을을 공습했다. 위치를 잘못 파악해서 공화군이 집결했던 곳이 아니었고 주민 2000여 명이 사망하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
친구들과 연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피카소는 다른 사람들을 깊이 이해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마지막 연인으로 알려진 프랑스와 질로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게 진정으로 중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네. 다른 사람들의 존재는 나에게 있어 공중에 떠 다니는 작은
먼지와 같을 뿐이네”
그래서 비평가 존 버거는 피카소가 그린 “여인들의 초상화는 그들 안에서 발견한 피카소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평 하면서 ”피카소는 여인들 속에 반영된 자신의 모습에서 진정한 자아를 볼 수 있었다. “고
썼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때로 달콤한 말로 달래고 위협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랑과 금전과 우정을 이용해
모델들이 그가 원하는 감정을 표현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당시 러시아 출신의 무용수 올가 코글로바를 아내로 두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마리 테레즈 발테르와 동거하며 오랜 관계를 맺고 있었던 피카소는 그들을 부드럽고 원만한 인상으로 표현했었다. 그런데 거친 색채로 칠해진 도르 마라의 초상화는 슬픔으로 인해 참혹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여 준다. 훗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 그림들은 모두 피카소 자신을 형상화한 거예요. 거기 도라 마르는 없어요.”
피카소가 회상하길 "나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라고 할 만큼 여성의 존재는 그의 예술의 원동력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자기는 평생 사랑했다고 하는데 과연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진정으로 사랑한 것일까?
애정을 가지고 그 대상을 묘사하고 싶은 그런 마음을 가진 게 아니라 그 대상에게서 표현해 보고 싶은 것을
얻고자 도라 마르를 의도적으로 잔인하게 괴롭혔던 것이다.
그 잔인한 성품에서 비롯된 작품이 전쟁의 잔악상을 단죄하는 공공의 이미지로 형상화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어떻게 개인적인 증오(또는 사랑)를 형상화한 예술 작품이 그 반대의 이미지를 암시하는
상징으로 변화될 수 있는가?
망구엘은 서구 문화가 여성을 짓밟는 잔인하고 무정한 남성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테세우스는 미궁을 통과해 미노타우루스를 죽이려고 할 때 아드리아네의 지혜를 이용한 뒤 가차 없이
버렸다. 사회적인 공익을 위한 정당한 조치로 여기고 테세우스를 영웅시한 것처럼 피카소의 경우에는
예술의 이름으로 남성의 잔인성이 정당화된 셈이다. 피카소는 일방적으로 사랑에 빠진 한 여성을 잔인하게
괴롭혀서 선량한 시민들의 고통과 슬픔을 표현할 수 있었다. 테세우스의 전설처럼 개인적인 슬픔을 표현한
<통곡하는 여인>과 대중에 고통을 그린 <게르니카>에서도 이런 이율배반적인 개념이 분명히 드러난다.
결국 고통받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리지도 못하고 상대에 대한 환상을 묘사한 피카소는 고통의 주제를
드러내는 데 성공했고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반전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그림의 주제를 놓고 고통의 개념을
표현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그런데 고통을 주제로 그린 사람이 고통받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고통을 바라보는 재능 있는 눈과 손이 있고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귀와 도움을 줄 수 있는 어깨를 갖지 못했다.. 정작 피카소는 거기서 죽은 인간들이 안타까운 게 아니라 동물들이
죽은 것이야 안타깝다고 이야기했으니…!
"좋은 예술가는 베끼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라는 피카소의 아포리즘은 그의 삶과 예술의 일관된
원칙으로 보인다. 그래서 마티스는 피카소를 싫어했을 것이다. 나는 작품과 예술가의 인격은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재능과 인성은 같이 가는 경우가 드물다. 자신의 이기적 욕구와 야망을 위해
주변 사람들을 먼지쯤으로 여겼다면 유명하다고 해서 다 좋은 작품일 수 없다. 소위 피카소의 천재성에
가려진 그늘을 함께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