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삶> 한나 아렌트
“삶은 무수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쓰거나 말하지 않으면 모두 사라진다.”
인간의 사유와 의지의 문제를 다룬 한나 아렌트의 마지막 저서를 읽고 있다.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무수한
오해를 낳을 수밖에 없지만 ‘사유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특정한 환경에서 악을 범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 책은 그녀가 예루살렘 법정에서 진행된 아이히만 재판을 참관하면서 인간의 정신 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로 사작되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악행이 나오게 된 원인을 사악한’ 동기나
이데올로기적 열정에 좌우되기보다 ‘생각하지 않는’ 데서 찾았다. 정신(시유)의 본질을 행위라고 본 것이다.
우리를 넘어서 있는 자연적인 영역에 대해서 인정하고 계속 나아가는 것이 삶이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은 흥망성쇠로 이어져 온 역사 속에서 거듭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데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절망’이 문제다. 믿음이 없다면 살아있다고 해도 의미를 갖지 못하고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생물학적 죽음으로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 해도
내가 진실하게 행하고 말한 것은 누군가(자식들)의 기억과 유전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신이 우리를 다 보살핀다는 생각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정말 있어야 할 삶의 모습을
꿈꾸게 하는 근거가 된다. 신앙을 통해 인간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쾌활한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일상적 삶을 견고하게 둘러싼 진부함, 위선과 거짓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신을 의식하고 산다고 해서 확실하게 ‘이거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신앙은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자기 확신이 아니다. 옳은 것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지성이나 과학적 사고가
신앙의 바탕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이나 이념적 한계에 갇히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진정한 자신을 이루는 것은 일생을 바쳐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종의 자가류에 빠져서 살아간다. 자기 확신과 우월감을 가지고 모든 것을 평가하거나
합리화하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맞는지 돌아보지 못한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편견에 싸여서는 안 된다. 인습과 통념, 어떤 이념에 매이지 않고 부단히 자기를
객관화할 필요가 있다. 믿음이 있다 없다를 판단하기 어렵지만 믿음의 징표는 행위로 나타난다. 자신의 토대를
이루는 경험과 생각의 틀을 깨고 옳은 것을 찾아나가는 노력을 하고 있느냐로 볼 수 있다. 올바른 것과
진실을 존중하는 믿음이 있다면 자신의 행동에 앞서 선택하는 근거로 삼을 것이다.
인간이란 무지와 왜곡 속에서 살아가게 마련이지만 하느님을 의식한다면 달라져야 한다.
아렌트는 사람들이 인간 문제를 해결하는데 여유가 없기 때문에 잠정적 판단인 편견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강력한 요인인 사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한다.
보이지 않으나 영원한 것, 인간의 내적 직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고귀한 이상과 진리는 말로 할 수밖에 없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행위하고 판단하며 삶을 영위하는 기준은 궁극적으로 정신의 삶에 좌우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