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에서

T.S. 엘리엇 <황무지>

by 명규원

V. 천둥이 한 말


땀에 젖은 얼굴에 횃불이 붉게 비친 후

동산에 서릿발 같은 침묵이 있은 후

돌밭의 고뇌가 있은 후

외치는 소리와 아우성 소리

감옥과 궁궐과 먼 산을 넘어서

울려오는 봄 우렛소리

살았던 그분은 이미 죽었고,

살았던 우리들은 지금 죽어간다

간신히 참아 가면서


여기는 물이 없고 다만 바위뿐

바위만 있고 물은 없는 모래밭 길

길은 산속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데

물이 있다면 발을 멈춰 목을 축이련만

바위틈에선 멈출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땀은 흐르고 발은 모래 속에 파묻힌다.

바위틈에 물이 있다 해도

침도 못 뱉는 이빨 썩은 입 같은 죽은 산

여기서는 설 수도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다

산속엔 정적마저 없고

비 없는 메마른 불모의 천둥소리뿐

산속엔 고독마저 없고

다만 갈라진 흙벽 집 문에서

비웃고 으르렁대는 시뻘겋게 성난 얼굴들이 있을 뿐

·····

·····

·····

산속의 이 황폐한 골짜기에선

희미한 달빛 아래 풀들이 노래하고 있다.

예배당 둘레의 허물어진 무덤 위에서.

거기엔 텅 빈 예배당 다만 바람의 집이 있을 뿐.

창도 없고 문은 삐걱거린다,

마른 뼈들이 사람을 해칠 리 없다.

다만 한 마리 수탉이 지붕마루에서 운다

꼬꼬 리꼬 꼬꼬 리꼬

번쩍이는 번갯불 속에서. 그러자 습한 바람이

비를 몰아온다.

갠지스강은 바닥이 드러나고, 맥없는 나뭇잎들은

비를 기다릴 제, 먹구름은

먼 히말라야 산 너머로 모여들고

밀림은 아무 말 없이 등을 구부려 쭈그리고 있었다.

그때 천둥은 말했다.

다타(주라),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주었는가?

벗이여, 내 가슴을 뒤흔드는 피

나이 먹은 분별로도 어쩔 수 없는

한순간에 굴복하는 그 무서운 대담(大膽)

이것으로 이것만으로 우리는 살아왔건만

그렇다고 죽은 뒤 약력에 남을 것도 아니요

자비로운 거미가 줄을 친 비명(碑銘)에도

빈 방에서 여윈 변호사가 재봉하는

유서에도 남을 것이 아니다.

다.

다 야드 밤(共感 하라), 나는 언젠가 문에서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단 한 번 도는 소리를

우리는 그 열쇠를 생각한다, 각자 자기 감방에서

열쇠를 생각하며, 각자 감방을 확인한다

다만 밤이 깃들 때면, 천상의 풍문(風聞)이

잠시 코리오레이너스를 생각나게 한다

담아 타(自制 하라), 배는 즐거이

따른다, 돛과 노에 익은 사람 손에

바다는 잔잔하여, 그대 마음도 부름 받았을 땐

즐거이 따랐으리라, 조종하는 손에 맞추어 뛰며

나는 강가에 앉아

메마른 벌판을 등진 채 낚시를 드리웠다.

최소한 내 땅만이라도 바로잡아 볼까?

런던 교가 무너진다 무너진다 무너진다

'그리고 그는 정화하는 불길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언제 나는 제비처럼 되랴' -- 오 제비여 제비여

'폐허의 탑 속에 갇힌 아꾸뗀느의 왕자'

이러한 단편들로 나는 나의 폐허를 지탱해 왔다

아 그렇다면 분부대로 하지요. 히어로니모는 다시 미쳤다.

다타, 다 야드 밤, 담아 타.





물이 없고 바위만 있는 황무지! 정신력을 상실한 끝없는 벌판 위로 자식들의 미래를

내다보며 걱정하는, 어머니의 탄식과 같은 흐느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천둥은 다, 다, 다로 울리지만 다티(주라), 다 야드 밤(공감하라),

담아 타(자제하라)라고 하는 세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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