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인류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by 명규원

우리의 이성과 지식, 통찰 등이 항상 나약해서 욕망과 분노의 습격을 받는다. 도덕적 직관을 상실하고

무도덕성의 오류를 범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기적을 바라고 기대했던 것은 무모했을까?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언급했듯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참으로 불행히도 생각하는 힘은

인간의 다른 능력에 비해 가장 약하다..

대중의 무리 속으로 밀려 들어가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인간이라는 의식은 필연적으로 신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지성을 가꿈으로써 개인적 완벽에 이르겠다는

목표는 과연 타당한가? 아무리 고차원적인 사고와 이성에 따라 행동하려는 사람이라도 존재의 원천을

벗어날 때마다 자기기만의 덧에 빠지게 되어 있다.

긴 기도 형식으로 쓰인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놀랄 만큼 자의식이 강하며 신과의 관계를

치열하게 파고들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자기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문제였다. 인간의

약한 의지는 신의 은총이 없으면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의지 하는 일은 나와 함께 있으되 나는 선한 것을 수행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사도 바오로가 고백했듯이 인간의 의지는 강력한 동시에 무력하며 자유로운 동시에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는 행위하는 것, 타인과의 교제함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나 자신의 대화 속에서 경험되는

것으로 아무도 나 자신과 벌이는 뜨거운 논쟁을 방해할 수

없는 ‘완전한 고독’ 속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는 타인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주권적이다.

그래서 ’의지‘를 ‘이성‘과 ‘욕망’ 사이의 중간 개념으로 그렸던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개인의 탄생을 아우구스티누스로 돌린 이유가 있다.

인간의 타락은 그에게 간접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고,

또 자신의 내면에서 인간 종을 보았다. 모든 인간, 인류의 운명은 동등하다는 사상이 깔려 있는 것이다.

원죄의 개념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간과 절대적으로 다른 신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원죄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은 자신이 왜 생겼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피조된 존재이므로 세상을 다 알 수 없고 어떤 부분이나 단편을 절대화시켜서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지녔어도 인간의 생각과 행위,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의 부족함과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신앙과 지혜의 출발점이다.

“나의 마음은 자체의 힘을 깊이 의심하면서 마음 자체의 보고를 신뢰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신을 찾는 것은 불확실하지도 않고 착각도 아닌, 유일한 ’ 기쁨’을 찾는 일이다.

그리고 신의 은총을 향해 자기를 여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만들었지 우리가 우리를 만들지 않았다. “는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신의 사랑은 모두가 다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고

끊임없이 내면을 새롭게 가꾸는 것이 필요하다. “깊이는 또 다른 깊이를 부른다.”

신에게 자신의 약점을 고백하는 것이 진정으로 경건한 태도이고 개인의 내면성은 침묵의 영역이 아니라

대화의 영역, 신과의 대화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영역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먼저 발견하지 않고는

신을 발견하기를 바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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