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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나, 집속의 나

by 명규원


2019년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주제를 잡느라 고민하다가 보르헤스의 도움을 받아

그렇게 정했다. 내가 그린 그림을 내가 이야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작가노트

겸 초대의 글을 계속 써 왔다.

아주 오래된 내 안의 이야기를 꺼내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젊은 날 나는 숭고한 대의를

위해 살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개인적 꿈이나 행복을 바랄 수 없었고 스스로 금욕주의

원칙을 고수했다. 시대의 문제에 공감하고 사회변혁을 위해 헌신할 자세가 되어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찾아다녔다. 그런 동류의식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였고 외로웠다.

가끔씩 그 소수의 집단 속에서 친밀함과 안정감을 얻기도 했지만 길 위에서 나아갈

바를 몰라 헤매기도 했다.

그 시절에 늘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떠날 것인가?'라는 문제로 방황한 적이 많다.

소소한 행복이나 일상의 만족으로 가는 길은 거의 차단되어 있었으니 삶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부유하는 존재였다. 당연히 나의 영혼과 내면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었다. 소위 진보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다수가 되었고

사회는 오히려 자유 민주주의가 아닌 경찰국가로 퇴보할 위기에 처했다. 이제 나는

망탈리테(mentalite-집단적 사고방식과 집합적 무의식의 총체)의 편협성과 한계를 아는

나이를 벌써 지났다. 부단한 회의의 과정과 자기반성을 통해 '집 속의 나'로 만들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더 이상 '길 위의 나'가 될 수 없었다.

사실 '길 위의 나와 집 속의 나'는 하나이고, 여전히 우리는 모두 길 위에 있다.

그런데 너나없이 현대인들은 길 위에서 공간을 점유하지 못한 채 떠도는 시간이 많다.

잠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장소가 제공되더라도 머물 곳은 없다. 집이 있어도

여러 가지 이유로 나와서 돌아다니고 그럴듯한 분위기의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것을 찾아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마치 마음

편한 곳, 두 발 쭉 뻗고 쉴 수 있는 곳이 바로 집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깨닫기

위해서인 것처럼.

먼 길을 돌아서 나는 예술의 길에서 집을 찾게 되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나 그리움은 내면의 공간, 집을 갖지 않고는 만날 수 없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비교할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 어느 무리에도 속하지 않아서 떠밀려

다닐 일은 없다. 나를 더 알아가고 내면세계가 지닌 풍요로움을 만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길'로 '혼자서' 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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