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분기점

폴 오스터, <달의 궁전>

by 명규원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써 나가는 작가야. 내가 쓰고 있는 책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그건 원고인 셈이지 그보다 더 적절한 게 뭐가 있겠니? ”

볼 오스터의 책을 읽으면서 바로 빠져들었다. 어떤 사건과 일이 진행되는 것보다 주변

사물이나 인물의 특성, 주인공의 생각과 내면세계에 대한 묘사가 자나치고 인과관계가

너무 분명해서 몰압이 안 되는 소위 사실주의 소설과 달랐다. 오랜만에 이야기꾼 소설가를

만나 즐거웠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어머니와 살던 주인공은 11살에 갑자기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클라리넷 연주자인 외삼촌과 살게 되었다.

대학에 다니기 위해 뉴욕으로 떠나올 때 다정다감하고 아낌없이 내주기를 좋아하는 외삼촌은

1천 권이 넘는 책을 선물로 주었다. 그런데 1967년, 가장 사랑하고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외삼촌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어 엄청난 충격과 슬픔보다 더 지독한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극단적인

고립과 방황이 시작되고 앞이 보이질 않는다.


‘인간이 달 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그해 여름이었다. 그때 나는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이였지만, 이제부터는 미래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위태위태한 삶을

살고 싶었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본 다음, 거기에 이르렀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싶었다.‘

소설의 첫 문장이 전체 내용을 암시한다. 마르코 포그는 가구 대용으로 썼던 책 박스를 열어

책을 다 읽으면 헌책방에 팔기 시작했다. 경제적 곤경에 처해 도 아무 계획 없이 버티며

굶주리다가 길바닥으로 나앉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러다가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친구 짐머, 마음을 열어 준 키티 우를 만나게

되어 휠체어를 의지한 괴팍한 노인에게서 산책시키고 전기를 쓰는 일을 얻게 된다. 거의 매일

산책 나가서 눈이 보이지 않는 에핑에게 사물들을 설명하다가 호통을 쳐대는 그와 함께 사물들의

진실을 만져질 듯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간다.


“내가 말하는 문장들을 단순화하고 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부수적인 것을 분리할 줄 알기 위해서는

몇 주일 동안의 힘든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어떤 사물 주위로 더 많은 여유를 남겨두면 남겨둘수록

그 결과가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에핑이 자기 스스로 결정적인 일, 즉 몇 가지 암시를

기초로 해서 이미지를 구성하고 내가 그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 사물을 향해 자신의 마음이 여행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에핑은 화가였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서부로 갔다가 큰 모험을 했으며 파리에서 살기도 했다.

그의 친구 랠프 블레이크 록은 달빛을 소재로 낭만적이고 신비한 그림을 그렸던 화가로 나온다.

포그는 브루클린 미술관을 찾아가서 에핑이 말한 그 그림, < Moon Light >를 한 시간 동안 보면서

화가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정신을 쏟아보려고 노력한다. 땅과 같은 초록색을 띤 하늘,

낮처럼 보이는 밤, 풍경이 거대하므로 왜소해진 인간들의 형체, 그림 속의 인디언들은 어떤

두려움이나 불안감도 드러내지 않고 그들을 둘러싼 환경 속에서 평온하게 살고 있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도 똑같은 숲 똑같은 달 똑같은 정적이 흐르는데 달은 언제나 조그맣고 완벽한 보름달이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인간의 이상향을 그린 그림이라고 볼 수 있는데, 어려서 이발소에 걸려있던

밀레의 만종 그림 사진, 알프스의 웅장한 산과 계곡, 물레방아와 초가집이 같이 있던 풍경화가

비슷한 느낌이다.


폴 오스터는 우연을 사건의 전면에 내 세우고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진다. 미스터리와 우연의 일치에 기반해서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에 독자가 설득당하게

만든다. 포그가 에핑의 요구와 유언을 충실하게 따르다가 아버지를 알게 되고 만나는 놀라운 일들을

겪게 된다.

폴 오스터와의 대화를 엮은 <글쓰기를 말하다>를 통해서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었다.

"소설의 아름다움은 세상에 존재하거나 존재했던 모든 것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사물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 세상의 많은 부분에 생각이 닿게 되고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는 일이 가능해진다. 달의 풍경으로 묘사된 유타 사막, 포천 쿠키에

적힌 쪽지에 ‘태양은 과거이고, 지구는 현재이며, 달은 미래다.’라는 테슬라의 말, ’ 달의 궁전’이라는

이름의 식당 등이 제목으로 연결된 이유를 알았다.

또 무엇보다 달은 반복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은 육채적 존재이고 인간의 경험은 순환한다는

자연의 섭리, 각각의 세대는 앞 세대의 잘못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 이는 진보의 개념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포그가 세상을 헤치고 나아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고자 고군분투하지만 책이 끝날 때에도

다시 시작점, 진정한 어른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기 직전의 분기점에서 작별을 고하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세상에 하나뿐인 경험과 시선을 거진 존재로 살아있는 것은 신비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인생의 분기점을 맞이한 포그는 잘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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