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크리스마스> 폴 오스터외 지음
크리스마스 날 창밖에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다. ‘폭풍의 언덕’처럼 바람소리가
들리는 것은 추위가 찾아왔다는 신호다. 산자락 언덕에 자리한 주택 2층이라서
앞이 트인 대신 바람과 태풍에 취약하다.
조용한 시간에 모닝커피를 마시며 <세상의 모든 크리스마스>를 다시 펼쳐서 읽다가
‘또 한 번의 크리스마스’를 재독하고 작가윌리엄 트레버를 기억하게 되었다.
안톤 체호프와 제임스 조이스를 계승한 단편소설의 거장이며 내가 좋아하는 엘리자베트
스트라우트, 줌파 라이히 같은 작가들의 작가라 할 수 있다.
이야기 배경은 아일랜드인의 정체성을 지닌 작가의 경험과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가족들이 다 모이게 될 것을 기다리고 있는 부부의 대화가 평온해
보인다.
“애들이 모두 오면 굉장할 거야.”
그러나 런던에 살고 있는 그들과 집주인 조이스와의 관계가 소원해져서 이번 크리스마스
날에는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노라의 말을 남편은 귀담아듣지 않는다.
전에는 금요일 밤마다 찾아와서 차를 한잔 마시고 잡담을 나누고 9시 뉴스를 보았던 사이다.
크리스마스 날마다 아이들을 위해 선물 보따리를 가져왔었다.
8월 어느 날 아일랜드인의 폭탄 테러 사건에 대해 아무나 닥치는 대로 남의 목숨을 빼앗는
자들의 행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야만적이라고 비난한 조이스 씨의 말에 남편 더못은
북아일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이 당한 일을 잊어선 안 된다고 해서 대화가 중단된 일이 있다.
그 후 조이스 씨의 발길이 끊어졌다.
노라는 늙고 외로운 조이스 씨의 관대함과 재치를 존중하지 않고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완고함으로 맞선 남편의 편협한 생각과 신앙에 대해 분노하지만, 표현할 수 없다. 지금껏
소중히 여긴 우정을 잃고 생애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혼자 쓸쓸히 보낸 뒤 조이스 씨는
해가 바뀌기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녀는 과거의 크리스마스만 있을 뿐 또 한 번의 크리스마스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한다. 감정이 결합된 기억은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을 방해한다.
더못은 매우 신중하고 ‘평화와 선의‘가 크리스마스에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쥬관적 인식의 한계를 결코 넘어서지 못했다.
광주 출신이지만 광주를 떠나 전체적인 시각을 갖고 세상을 보려는 입장에서 노라에게
공감한다. 분노나 원한에 사로잡히거나 피해의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삶은 피폐할 수밖에 없다.
인류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와서 ‘서로 사랑하라’는 뜻을 남긴 예수의 생애를 기억해야 한다.
신의 사랑은 누구나 누릴 수 있고 크리스마스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윌리엄 트레버는 평범한 이야기를 통해 넌지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