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 존재

<인기 없는 키르케고르> 피터 드러커, 1933

by 명규원


피터 드러커가 현대 세계를 위해 의미 있는 사람으로 키르케고르를 주목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모든 종교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카르케 고르는 '어떻게 인간의 존재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중심에 두었다. 19세기 내내, 이전에 서구 사상의 핵심이었던 이 질문은 거의 인기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고 무관해 보였다.

루소, 헤겔, 마르크스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사회 속에서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사회가 점차

역사적으로 진보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인간이란 사회적 존재로서 의미가 있고 사상과 시민은

존재하지만, 개인으로서 인간, 적어도 인간 존재는 어떻게 가능하냐는 질문과 무관했다.

사회를 구성하는 시간에서 우리는 개인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한 종의 일원일

뿐이고, 세대 간의 연결고리를 이루고 있다. 그 종은 시간에서 자율적인 생명., 특성, 자율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그 구성원은 생명도, 특성도, 종 외의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개인의 죽음은 종이나 사회를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서의 삶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의 존재는 오직 긴장 속에서만 가능하다. 정신이 본질인

개인으로서 인간의 동시적 삶과 사회에서의 시민 사이에서의 긴장이다. 영원에는 오직 개인만이

존재하고 각 개인은 유일무이한 존재다. 우리들 각자는 앞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그 시대의 유산을

받아서 살아가고 다음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려준다. 그러나 그 정신에서 각자가 시작과 끝을 맺고

있다. 그의 아버지가 경험한 그 어떤 것도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 끔찍한 외로움 속에서

완전하고 독특한 고독 속에서, 그는 마치 우주 전체에서 자신과 자기 안에 있는 정신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자신을 마주 한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는 두 수준에서의 존재, 사회적 존재와 개인이라는 긴장 속에 있는 존재다.


시간을 쌓아 영원을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많은 시간, 무한히 더 많은 시간은 그저 시간일

뿐이다. 그리고 영원을 세분화하여 시간에 도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영원은 분리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존재가 가능한 것은 정신 속에 존재하는 것과 사회에

존재하는 것만큼의 동시적 존재일 뿐이다.

인간의 존재는 영원의 존재와 시간 간의 존재 사이의 긴장 속에서만 가능하다. 정신의 영역에서

인간은 오직 개인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홀로 고립되어 완전히 자신의 의식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회에서의 존재는 사회적 가치와 신념, 보상과 처벌을 진정한 영역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만,

정신에서의 존재,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모든 사회적 가치와 믿음을 순수한 기만, 허영심, 거짓,

무효,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할 것을 요구한다.

키르케고르는 누가복음 14장 26-27절의 말을 인용하여 말한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인간의 존재는 오직 시간과 영원의 동시적 시간과 영원의 동시적 존재로서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화해할 수 없는 두 윤리적 절대적 존재 사이에서 으스러져야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비극적 존재로서만 가능하다. '하느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두려움과 떨림을 잊지 않고 두려움과 불안

속에 무엇보다도 절망 속에 존재한다. 자신에게 절망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넘어서기를 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바르고 견고하게 설 수 있게 해주는 어떤 것, 신뢰할 수 있을만한 무엇, 진실을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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