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한 기쁨

<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 조애리 ​

by 명규원

시인의 말은 창조적으로 작용하며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산출한다. 언어를 자율적으로 내재화하면서 미적 형식을

갖추고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시인은 언어를 부림으로써 현실을 넘어선 상상력을

자극하고 가라앉거나 그늘진 마음에 빛을 비추어 준다.

불안과 슬픔, 외로움에 흔들리는 우리가 영혼의 자리를

찾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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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는 것들이 있다 -

새들 - 시간들 - 꿀벌들 -

그래도 애도의 노래를 바치지 말자.


머무는 것들이 있다 -

슬픔 - 언덕 - 영원 -

네게는 과분한 것이다.


이렇게 머무는 것들이여, 날아가라.

내가 하늘을 설명할 수 있을까?

아직도 여전히 수수께끼!


에밀리 디킨슨은 월트 휘트먼과 더불어 19 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30여 년 전 처음 그녀를 알게 되었을 땐

자연 시인으로 신비한 베일에 싸여 있었다. 수줍음이

심하고 하얀 옷을 입고 집을 떠나지 않았다고….

그런데 자연과 매우 친밀한 정서뿐 어니라 인간의 내면을

깊게 파헤치고 한 개인과 여성으로서 주체성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집에 은거한 이유는 어머니의 병간호와

주부의 역할을 하며 아버지를 보살피는 것도 있었지만

사회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한 방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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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여, 강하다고

날 칭찬해 준 그 첫날 -

원하면 더 강해질 수 있다고 말해준 그날 -

그 많던 날 중 - 그날 -


그날은 - 부채 모양 금장식으로

둘러싸인 보석처럼 - 빛났어요 -

어렴풋한 배경이던 - 하찮은 날이 -

이 세상에서 - 가장 중요한 날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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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에서 하나뿐인 동맥 인 -

그대를 잘라 내고 -

그대를 떠나, 시작하면 -

곧 죽음의 날 -


수많은 파도가 일렁이는 -

발트해에서 - 그 파도들이 -

장난으로, 그대를 지워 버리면,

나도 - 멀리 밀려 가

남아 있지 않아요 -

‘내’가 곧 그대니까요 -


뿌리가 없어지면 - 나무가 없어지듯이 -

그대가 없어지면 - 그때 - 나도 없어져요 -

천국에서 영원이라는 큰 호주머니를 -

소매치기당하는 거죠 -



그녀의 시는 제목 없이 번호로 되고 - (dash)를 자주

사용한다. 뉴잉글랜드 시골에 살면서 몇몇 지인들과

꾸준히 편지 교환을 했고 외부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은

삶이었지만 1800여 편의시를 통해 내면적으로 격렬하고

예사롭지 않은 삶을 짐작할 수 있다.

계절의 변화와 하늘, 구름, 산, 언덕, 석양, 꽃, 벌, 새 등을

관찰하고 영감을 받았으며 삶과 뗄 수 없는 사랑, 죽음,

영원, 천국에 대한 시들도 많다.

에밀리 디킨슨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비평가 히긴슨을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산다는 것에서 황홀경을 발견해요. - 살아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한 기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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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언제 올지 몰라.

문을 모조리 연다.

새벽은 새처럼 깃털을 가졌을까,

아니면 해변처럼 파도가 칠까



그녀에게 지상의 하루하루는 새로운 기대와 기쁨으로

열렸다! 새벽과 아침은 그녀의 찬구였으며 향유로 가득 찬

삶을 선물처럼 맞이한다. 자연에서 느끼는 '황홀'은

그녀를 누구보다 부자로 만들어 준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없고 넘어설 수 없는 벽과 한계를 응시하면서 '

심장 속에 부리를 담그고 심장으로 노래'하는 새가 되기도

한다. 비록 처절한 피울음을 울지라도 묻어두고 영원을

의식하며 현재를 살아간다.

시집을 옆에 두고 읽으며 우주의 고독 가운데 떨칠 수 없는

죽음, 상처와 슬픔이 사라지지 않는 삶을 받아들인 그녀와

조금 더 가까워졌다.

호사스러운 순간을 즐길 줄 알며 통통 튀어 오르는 밝고

명랑함을 지닌 참 멋진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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