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나도 가끔은 집사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 뭐 필요한 것이 있는지, 불편한 데는 없는지 살피고 알아서 챙겨
주는 사람 말이다. 누구나 어느 정도 관심과 돌봄을 바라고 살 것이다. 그런데 신사다운 주인을 섬기고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으나 불행한 집사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뒤늦게 주인의 결함과 오판에 눈뜨게 되지만
'불의와 고통이 끝나는 것을 보고 싶은 소망'이 천성에 너무나 깊이 배어 있었기 때문에 주인이 달리 행동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이해했다.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 가혹한 것이라고 여기는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비공식적 모임을 주도한 나리의 뜻을 집사로서 충실히 따랐을 뿐이다. 독일에 우호적인 나머지 유대인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온 하녀들을 쫓아내라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달링턴 홀에서 평생을 보낸 집사 스티븐스는 주인 못지않게 교양 있고 품위가 있어 보인다. 가히 '일 등급'이라고 인정받을 만한 수준에서 능력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종교적으로 '신실하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집사로서 주인에게 총체적이고 지속적으로 봉사하려는 자세를 뼛속 깊이 지녔다.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함으로써 역사의 흐름에 공헌하는 데 일조했다는 자부심도 컸다. 초청객들이 모인 자리라서 부친의 임종을 지키는 일을 포기했고, 동료 켄턴 양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을 억누르다가 결국 그녀를 떠나보내기까지 했다. 두 사람이 하루 일과를 마친 후 만나는 시간이 행복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어디까지나 집사로서의 소임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가 위대한 집사로서 복무하고 주위로부터 인정받은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무슨 가치가 있을까?
스티븐스가 이지적으로 선택한 달링턴 경은 동정심 있고 온유한 신사였다. 그의 헌신은 저명한 가문에 속한 달링턴 경과 자신을 동일시하고자 하는 내적 욕망과 결합되었을 것이다. 새로운 주인의 권유로 떠난 여행에서 자신을 귀족으로 여기는 시골 사람들의 추측을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드러나고 만다. 하지만 달링턴 경은 순진한 의식 때문에 히틀러에게 이용당했다. 제대로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뻔한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말았다. 그런 결과에 대해서 스티븐스는 "오늘날 나리의 삶과 업적이 안쓰러운 헛수고쯤으로 여겨진다 해도 내 탓이라고 할 수 없다. 나에게도 응분의 가책이나 수치를 느끼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라고 선을 긋는다.
스티븐스는 감정 절제에 관한 영국식 품위를 신성시했다. 그는 불합리가 만연한 현실에 매몰된 채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려고만 했다. 결함이 있는 신념이지만 스스로는 그런 줄 모른다. 그래서 주인의 부탁을 받고 자연의 이치(남녀의 성숙한 관계)를 깨우쳐 주려 했던 젊은 카디널에게 오히려 통렬한 지적을 당했다.
"훌륭하고 숭고한 것을 저들이 어떤 식으로 이용하는지 당신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소. 스티븐스?"
"죄송하지만 딱히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군요."
사람이 품위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일까? 고귀한 의복과 음식, 멋진 태도로 이루어진 삶의 양식보다 중요한
것은 생각(감정)과 행동이다. 사실 모든 사람은 귀족으로 태어났다.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자기를 스스로 귀하게 여기고 살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선택하며 행동에 따른 책임을 지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품위는 당장의 만족과 눈앞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사실을 공정하게 보고 올바르게 생각하려는 자세에서 나온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이끌어가기 위해 필요한 농담 실력이나 유머감각이 아니라 사태를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인생의 황혼기에 다시 한번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살 수 있는 기회가 스티븐스에게 주어졌다. 아직 '남아있는 나날'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서로에 대한 호감(사랑)을 간직한 켄턴 양과의 재회에서도 안타깝게 궤도 수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삶과 과거를 편안히 돌아볼 수 있는 그녀와 달리 고통과 회한을 안고 스티븐스는 자신의 일자리로 돌아간다.
고통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또한 개인의 성품을 단련시킨다. 고통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예술과 학문, 과학이나 종교에서 어떤 성취도 이룰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거나 상실의 아픔을 겪을 때 절망과 쓰라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고통의 골짜기는 영혼을 빚어내는 계곡이고 인간의 품격도 제조된다. 아우슈비츠에서 동생을 잃은 레비나스에게 '고통'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의미도 쓸모도 없는 경험이었다. 그의 사유는 내가(우리가) 받는 개인적(주관적) 고통이 아니라 '타자가 받는 고통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초점이 있다. 의식 안에 수용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방식 그 자체인 고통은 아무런 방어나 보호 없이 굴복당하는 것이다. 이성을 통해서 고통을 해명하거나 정당화하는 것도 물론 가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나스는 "사람이 고통 없이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없다."라고 본다.
인간의 됨됨이, 생각과 행동의 품격은 물질적으로 생활에 여유가 있고 사회적으로 품위를 유지할만하다고
해서 자연히 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정신이 빈곤하면 안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해야 한다.
의식하면 누구나 그럴듯하게 보이는 행동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과 대면할 때이다. 자신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자신과 대화하고, 자신의 감정이나 이해관계에 치우친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자신이 옳다고 해서 단정 짓거나 타인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는 것도 조심하고.
어떤 상황에 처할 때 자신의 안위만 생각한다든지 깨끗하고 보기 좋은 것만 찾고 힘들고 어려운 일은 다른
사람에게 떠맡기려 든다면? 만사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품위와는 멀다. 품위를 지키는 것은
귀족 다운 면모를 가졌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생각을 올바르게 하고 자기 잘못을 반성할 줄
아는 정직함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신적으로 부유한 귀족이다. 오늘날의 귀족은 양심과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무엇이 옳은지 묻고 찾아나가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귀 기울이며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갖추는 지적 활동도 필요하다. 용기 있고 진실된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이 항상 이루어져야 인간으로서 품위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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