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하고 절대적인

"공간은 양적이고 시간은 질적이다."

by 명규원

<픽션들>, 보르헤스


기발함과 상상력에 있어서 소설 속 세계는 탁월하고 낯설다. 미로를 헤매듯 실재와 허구가 뒤섞인 세계는

과거와 미래도 현실인양 착각하게 만든다. 이해하기 어려운 자신의 문학 이론을 소설화한 작품들과 철학, 신, 죽음, 영원, 시간과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를 이야기 속에 용해시켜 놓은 보르헤스는 넘기 힘든 산처럼 저만치

서 있다.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공포와 희망을 다양하게 조절하면서 모든 것이 제비뽑기로 결정되는 가상의 사회다.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 재생산되고 유지되는 사회구조와 규범, 체계들을 다른 시각으로 본다. 우리가 익숙하게

여기는 것, 숨겨지고 억압된 욕망을 끄집어내어 낯설게 한다. <틀륀,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하는 가짜 참고문헌과 각주를 제시한다. 독자가 집중하기 어렵고 혼란스럽게 함으로써 현실과 역사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장치로 이용한다. 서문에서 '방대한 양의 책을 쓴다는 것은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라고 밝힌 대로 상상의 책 위에 써진 주석으로서의 글쓰기다.


실재와 허구, 현실과 비현실을 모호하게 만든 '환상적 사실주의'란 무엇일까?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

그렇게 믿어온 현실에 대해 의문을 갖고 탐색하는 것이다. 현실이 확실하거나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문학을 통해 보다 깊이 있게 접근해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1차 세계대전을 언급한 책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실제로 언급된 내용이 없는 가짜 사실주의를

보여 준다. 단 한 권의 책과 미로를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취팽을 연구한 중국학 학자 알버트는 그의

정원을 복원시켰고 후손인 '나'와 만나 대화를 나누다가 살해당한다. 취팽의 소설이 가진 혼돈에서 책과 마로가 동일시된다.

'나는 다양한 미래들에게(모든 미래들이 아닌)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남긴다.'라는 취팽의 편지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공간이 아닌 '시간' 속에서의 무한한 갈라짐을 연상하게 만든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수수께끼를 말하고 우주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획일적이고 절대적인 시간이 아니라 서로 접근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는 시간들의 그물 속에서 우리는 그 일부분에 존재한다. 독자가 마주치는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나머지들은 버리는 가운데 다양한 시간들과 미래가 펼쳐질 수 있다. 인간의 인지구조를 모방한 컴퓨터의 세계가 0과 1, '이다'와 '아니다'로 모든 정보를 치환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는 인간의 삶이 물질적으로 공간을 확장시키고 자유를 누리는 대신 내면을 성찰하고 깊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은 사람이다. 상징적인 차원에서 공간은 이미지, 형상, 픽션인데 비해 시간은 실체이며 본질이라고 보았다. 오늘날처럼 이미지를 조작하고 이미지에 현혹되기 쉬운 사회도 없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헛된 열광과 속임수, 꾸며낸 이야기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을까? 보르헤스가 '시간'을 '존재의 궁극적 토대'로 인식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에게 시간과 공간은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시간 속에 내포된 하나의 형식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시간을 점유하는 방식과 밀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공간을 이동해서 새로움을 느끼고, 여러 가지 경험을 쌓는다고 해서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거나 취향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의 소설은 경험적이고 사실적인 인과성의 믿음에 근거한 리얼리즘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작가는 신과 같은 존재로 비현실적 구성을 통해서 즉, 마술적 인과성에 의해 소설적 진실성을 확보하려 한다. 이성적 추론의 한계를 넘는 예술에 대한 독자의 잠정적 믿음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있을 수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을까? 부단히 드러나고 사라지기를 거듭하는 시간의 마술성에서 그 단초를 찾는다. 인물과 사건의 배경에 대한 묘사가 축소되거나 추상화하여 공간적 언어를 시간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공간적으로 이해할 때 언어는 사실적이고 시간은 마술적으로 된다.

우리가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볼 수 있다면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영원을 갈망하지만 영원한 사랑이나 영원하고 절대적인 무엇을 기대할 수 없다. 모든 것은 변하고 소멸하기 마련이다.


"우리 인생은 영원한 실재를 향한 끔찍한 꿈이다."


보르헤스의 말대로 그 누구도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나라는 존재의 무거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실존에 대한 자각과 진정성을 지닌 삶을 바탕으로 주변 사람들에 대한 신뢰, 애정, 관용을 가지고 살아갈 때 역설적으로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커질 수 있다. 문학을 통해 진살을 찾고 삶에 대한 이해를 높여간다면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악몽이 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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