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함과 새로움
<주여 지금은 홀로 있는 이들을 기억하소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 수상록
조각가 로댕은 정직한 노동자와 같았다. 그는 자연으로부터 단순함과 솔직함이라는 진실을 배웠다. 자연이
스스로 그러하듯 순결하게 자기 갈 길을 찾아 성장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인간처럼'이 아니라 '자연처럼'
일하는 것이었다.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고 묵묵히···.
로댕에게서 우리는 예술가의 자격이란 자연과 삶에 대한 지혜와 관심을 가지고 성실과 의지로 철저하게
자신의 세계에 몰입하는 데 있음을 깨닫는다. '무한한 인내'로 표현되는 로댕의 삶의 방법은 젊은 시인 릴케
에게 고뇌로부터 하나의 피난처를 제공했다. 아직도 인생의 문지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제대로
알지 못한 릴케는 흐릿한 꿈과 비현실적 세계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지탱해 왔다.
그의 유년 시절은 자신의 꿈이 좌절된 부모의 요구나 기대에 맞추고 견디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혀 자신의
기질과 어울리지 않는 사관학교를 다니다가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중퇴하고 자신이 원하는 시와 예술의
세계를 찾아 떠날 수 있었다. 인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만 옛 기억이 너무나 무섭게, 혹은 무겁게
가슴을 누르는 고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지속적으로 체험한 상실감과 원망의 감정에 스스로 좌절한 면도 있었을 것이다.
"일하게!"
로댕이 릴케에게 던진 말이다. 35년이란 연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친화력을 느끼고 자신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찾아온 그를 5년 동안 받아 주었다. 로댕은 끊임없이 창조하는 위대성과 모범적인 예술가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일한다'라는 것은 로댕의 삶을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인상주의 조각가로서 예술
양식을 연구한 <로댕론>은 한 권의 책에 지나지 않지만 실제로 릴케가 파리에서 체험한 예술 의식이 드러난
아름다운 산문시였다. 로댕은 모든 것을 하나의 세계, 세계의 본질적인 차원으로 형상화했다. 그의 조각 작업을 통해 돌덩이가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지면서 드러내는 공간을 릴케는 인간의 동경과 불안이 사물로 화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이 공간이라는 조용한 지속과 위대한 법칙은 생명을 얻게 된다.
"인간의 심혼에서 흘러나오는 그리움이나 불안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담담하게도 사물의 모습으로
바꿔지기를 바라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던가? "
릴케는 모든 주관이 객관 속으로 흡수되어 버린 그러한 공간을 <장미의 내부>라는 시로 표현했다.
장미의 내부
어디에 이런 내부를 감싸는
외부가 있을까. 어떠한 상처에
이 보드라운 아마포(亞麻布)를 올려놓은 것일까.
이 근심 모르는
활짝 핀 장미꽃의 내부 호수에는
어느 곳의 하늘이 비쳐 있을까. 보라,
( 다른 번역 / 어디에 이 내부에 대한
외부가 있는가? 어떤 아픔 위에
이러한 아마포는 놓이는가?
이 열려진 장미들의,
이 근심 없는 장미들의
내부 호수에
비치는 것은 어느 하늘인가, 보아라, )
장미는 이제라도
누군가의 떨리는 손이 자기를 무너뜨리라는 것을
모르는 양
꽃 이파리와 꽃 이파리를 서로 맞대고 있다.
장미는 이제 자기 자신을
지탱할 수가 없다. 많은 꽃들은
너무도 충일하여
내부에서 넘쳐 나와
끝없는 여름의 나날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점점 풍요해지는 그 나날들이 문을 닫고,
마침내 여름 전체가 하나의 방,
꿈속의 방이 될 때까지.
릴케는 로댕이 노동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도 사물의 객관성을 읽으려는 능력을 발전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일시적 기분이나 마음의 울림을 미화하는 사람이 시인이다. 그런데 주관성과 몽상, 환상에 지나치게
기울어진 자신의 태도를 교정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에게 로댕과의 만남은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었다. 사물의 관조와 그 조형을 통해 그는 "모든 감정이 형상으로 부각될 때 그것은 무한히 위대한 것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내면성에 맞는 '객관적 상관물'을 발견하는 일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詩가 언술(言述)이 아니라 하나의 만들어진 사물처럼 되도록 '노동'하는 시를
정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물'이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역사와 사랑이 깃든 것,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미지의 것이다. 그런
사물의 미지(未知)를 다시 깨닫게 될 때 생명을 획득하게 된다. 사물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대하는 순수한 사랑이나 아름다움을 찾는 그리움 때문이다. 예술가는 언제나 그러한 사랑,
그리움을 지니는 존재이며, 사물을 창조할 수 있는 자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로서 로댕을 지탱하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로댕은 이렇게 말한다.
"진실은 영원한 것이므로 나의 작품은 받아들여지리라 믿는다."
로댕은 외면적인 완성의 모습을 경멸했다. 사람의 상상력에 무언가를 맡기기를 더 좋아했다. 그가 만드는
인물이 이제 막 형상을 갖추는 중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돌의 일부를 손대지 않은 채 남겨두기까지 했다.
그런데 진실은 그냥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희미한 소리이거나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화려
하고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에 치중해 살고 있다. 그래서 진실이 소중하고 가치가 있다. 이해관계를 떠나
사물(사실)을 있는 그대로 용인하는 것, 사심 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물론 이제는 순수하게 아름다움을 찾는 것만으로 예술의 역할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낯설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 추함까지도 경계가 없어졌다. 그러나 작가가 스스로 진실함을 찾는 것이야말로 변함없이
생명력 있는 작품을 만들게 한다고 생각한다. 표현하는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작가의 진정성(진실)
이야말로 예술가들 모두가 그토록 열망하는 새로움을 주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