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이 바람이 될 때> 폴 칼라니티
아직 삶에 대한 기대와 의욕이 넘치는 젊은 나이에 죽음의 불안과 고뇌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 책은 문학을 전공한 후 의사가 된 폴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남긴 글이다.
인도인 의사였던 아버지는 폴이 10살 때 가족을 이끌고 맨해튼 북쪽 브룽크스 빌어서 애리조나 주 소도시 킹만으로 이사했다. 그가 풍족한 햇빛과 사막의 자유를 누리는 동안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대단했던 어머니는 뱀에 대한 극심한 공포보다 자식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빈약한 학교 제도에 기대기보다 입시용 도서목록을 다 읽히고 킹만의 학교 제도를 바꾸는데 기여했다. 덕분에 그는 벽을 넘어 스탠퍼드 대학에 입학한다.
그는 무엇인가를 성취하기보다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에 더 끌리는 편이었다.
처음에는 인간의 의미를 다채로운 이야기로 전하는 문학을 전공했는데, 인간의 정신작용을 가능케 해주는 기관인 뇌의 역할을 알기 위해 생물학과 신경과학으로 방향을 바꾼다. 폴은 T.S. 엘리엇의 <황무지>에서
깊은 울림을 받았고, 러시아의 망명 작가 나보코프에게도 공감했다. <롤리타>로 알려진 나보코프 통해
“우리 자신이 고통받을 때 다른 사람의 명백한 고통에 얼마나 무감각 해지는가에 주목했다”. 대학원 학위
논문은 월트 휘트먼의 작품을 통해 ‘생리적·영적 인간’이라고 부른 존재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문학 연구의 주된 관심사가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반과학적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문학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진다. 그는 내면에 드는 확신을 좇아 예일대 의과대학원 입학을 준비한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과학의 역사 및 철학 과정을 통해서도 진지한 생물학적 철학을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의학을 실천하는 것임을 확인한다. 문학을 접는 대신 고통받는 사람들과 직접 관계를 맺고 육체의 쇠락과 죽음 앞에서도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속 고민할 수 있는 길을 택한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수련의 과정에서(특히 신경외과는 가장 엄격하고 힘든 과정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경험한 에피소드들이 상세히 기록된 부분은 마치 그 현장에 있는 듯 생생하다.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에서 레지던트 근무는 늘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견디어 내야 했고 파김치가 될 정도로 과로였다. 그러니 결혼생활에 큰 부담이 따르고 서로 사랑하지만 위기를 겪게 된다. 의사로서 성취감도 있지만 실패하면 괴로웠고 슬픔, 분노, 자책이 뒤따랐다. 기술적인 탁월함이 곧 도덕적 요건이라는 점을 절실히 깨닫기도 했다.
그는 연민을 베풀 줄 아는 좀 더 고양된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많은 고통에 익숙해져 버린다. 해부실에서 시체가 사물화 되고 엄숙하고 경건한 학생들이 소위 냉정하고 거만한 의사로 변화하는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수술에 성공하려는 헌신적인 노력과 불가피한 실패는 의학을 신성하면서 동시에 불가능한 영역으로 만든다. 사람의 생사가 걸린 일을 책임져야 하고 상황이 불리하거나 판단의 실수가 있을지라도 환자를 위해 끝까지 싸우려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그런 훈련을 함께 해나가다가 자살한 친구도 있었다. 의사로서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대신 지려다가 때로는 그 무게를 못 이겨 스스로 무너지고 마는 경우였다.
폴은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명망 높은 신경외과의 겸 신경과학자가 되는 길을 목표로 했다. 신체가 마비된 사람들이 머리만 써서 컴퓨터 기기나 로봇 팔을 움직이도록 해 주는 신경 보철 기술과 기초 운동 신경과학을 연구하는 스탠퍼드 대학의 한 연구소에서 일하기도 한다. 그런데 과학도 어느 분야 못지않게 정치적이고 경쟁이 치열하고 공격적이며 쉬운 길을 찾으려는 유혹으로 가득한 학문이라는 걸 알게 된다.
혹독한 수련 기간도 10년이 지났고 서른여섯 살에 정상에 오른 그는 전국 규모의 권위 있는 상도 받고
여러 일류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제안받기도 했다. 스탠퍼드 대학은 신경 조정 기법에 주력하는 신경외과
의사 겸 신경과학자를 찾고 채용 가능성을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암이 여러 내장
기관에 침투해 있다는 사실은 그의 삶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누군가가 내 앞길에 폭탄을 떨어드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의사로서 사람들이 삶의 과도기를 잘 넘기도록 도와주는 목자의 자격을 반납하고,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젊은 시절 신앙심이 더 깊었더라면 목사가 되었을 것이니까. 누군들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흔들리고 방황하지 않을 수 있을까. 더구나 오직 미래의 보상을 바라며 현재의 만족을 유보한 채 힘들게 견디어 왔는데····.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부단히 쌓아온 길에서 그런 삶의 정점이 결국 빛을 보지 못하고 스러지게 되었다면, 그 좌절감은 얼마나 크겠는가!
그동안 익숙해졌던 죽음이 자신의 구체적 현실로 다가왔으나 폴은 텅 비고, 냉혹하고, 공허하고, 하얗게
빛나는 사막밖에 보이질 않았다. 그는 미국 최고의 폐암 종양학 전문의의 진료를 받게 된다. 의과 대학원에서 만나 아내가 된 루시와 꿈꾼 인생계획은 접어두고 함께 이겨내야 할 고단한 시간만 남은 것인가? 그는
죽음의 불안과 고뇌에 빠지거나 희박한 생존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강인함으로 맞서는 비현실적인 낙관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의사로서 과학적 지식과 치료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환자로서 실존적 진정성(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죽음과 마주한 채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삶의 의미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 인간관계라면 아이를 키우는 일은 그 의미에 또 다른 차원을 더한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아내와 헤어지는 것이 폴에게 가장 무섭고 슬픈 일이라면, 아기는 죽음을 더 고통스럽게 하지 않을까? 그러나 고통을 피하는 것만이 삶은 아니다는 생각에서 가족의 큰 기쁨이 되고 멋진 선물인 아기를 낳기로 한다.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정자를 보관해 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폴은 생물을
규정짓는 특징은 생존을 향한 분투라는 사실(다윈과 니체가 동의한)을 떠올린다. 아기를 갖기로 결정한 이상 죽어가는 대신 계속 살아가기로 다짐한다. 그는 다시 문학에서 전진해 나갈 방법을 찾고 자신의 경험을 언어로 옮기는 글들을 쓰게 된다.
“죽음의 그늘이 너무 짙어서 모든 행동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를 짓누르는 근심이 사라지고 도저히 지나갈 수 없을 것 같았던 불안감의 바다가 갈라지는 순간-모세의 기적처럼-을 경험한다. 어느 때처럼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고 아침을 먹은 다음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데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 대한 응답이 떠오른 것이다. 오래전 학부 시절에 배웠던 사무엘 베케트의 소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에서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였다. 그는 침대에서 나온 뒤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는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I can't go on. I'll go on).”
다시 몸이 조금씩 회복된 폴은 신경외과의 레지던트로 복귀하여 소명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다. 산다는 것은 뭔가 특정한 것, 짐을 짊어져야 의미가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보람된 시간이었다. 숨 가쁜 생활을 버티고 나면 비교적 여유가 있는 교수 자리에 정착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품게 된다. 그러나 폐암은 더 심해졌고 뇌에도 새로운 종양이 자랐다. 맑은 정신을 최대한 오래 유지하며 시를 읽고 글을 쓰던 폴은 예후가 몇 달 되리라는 기대와 달리 갑작스럽게 상태가 악화되어 버린다.
그의 마지막 글은 딸 케이디를 생각하며 썼다. 모든 사람은 유한성에 굴복하고 돈, 지위, 야망은 바람을 좇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절대 빼앗기지 않을 미래, 케이디는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들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주었다고 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며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할지 알 수 없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더 이상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편히 쉴 수 있게 해 준 엄청난 존재였다는 메시지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처럼 신이 주신 아름다운 유산 두 가지는 ‘사랑’과 ‘고통’인지 모르겠다. 두 가지가 없다면 인생은 앙꼬가 빠진 찐빵처럼 밍밍하고 살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다.
사랑은 고통도 가치 있게 만들고, 고통은 사랑으로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폴과 그와 함께한 루시의 삶처럼.
“죽음의 심연 앞에서 한없이 위축되는 환자와 그를 바라보는 의사도 결국 희망이 필요한 존재”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폴은 의사이면서 환자이기에 그의 주치의와 대화하면서 상대의 입장도 생각한 것이다. 그는 치명적인 환자에게 정확한 예후를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희망의 여지는 반드시 남겨둬야 한다고 했다. ‘희망’ 또한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이고 신의 영역이다. 폴은 의사의 의무가 죽음을 늦추거나 환자에게 예전의 삶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무너져버린 환자와 그 가족을 가슴에 품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 자신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마주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그는 생각이 깊고 겸손한 성품을 가진 유능한 신경외과의사이자 신경과학자로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책을 덮으면서 폴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니 안이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폴처럼 절박할 수 있는데, 나는 과연 계속 나아가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자문하게 되었다. 신체적 고통에서 자유로운 내가 건강한 몸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인데 말이다. 그가 가차 없이 완벽을 추구하는 신경외과의 소명의식에 이끌려서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나아갔던 자세를 닮고 싶다. 그는 양심에
충실하고 선을 추구하며 죽음과 대면해서도 삶의 의미를 찾고자 분투했다. 의사로서 철두철미한 책임감,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죄책감과 비난도 견디어 낼 수 있는 내면의 힘을 지닌 인간이었다. 고통 속에서
문학을 통해 용기를 얻고 활기를 되찾는 폴의 모습이 참 감동적이다. 책이 영혼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증명해준다. 그래서 투병 중에 폴은 자신의 이야기를 썼고 이 책으로 우리 곁에서 다시금 문학과
글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