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성의 역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오래전 도서관 서가에 꽂힌 책을 집어 들고 한동안 읽었지만 낯선 세계였다.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보르헤스를 잊고 살다가 10여 년 전 다시 만나게 되니 반가웠다. 서점을 둘러보고 장정과 편집,
종이의 감촉 등 책을 직접 확인한 뒤 구입하는 취미를 지닌 남편 때문이다. 1977년에 눈이 먼 여든 살의
노인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리 세오 극장에서 대중을 상대로 강연했고 단편집 <칠일 밤>으로 만들어졌다.
지적인 성실성과 명민함, 겸손을 갖춘 작가의 열정이 담긴 주제들을 읽던 어느 날, 남편은 페니키아 선원들이 배가 침몰하는 순간 읊었다는 기도문에 감탄하며 들려주었다.
'카르타고의 어머니, 노를 돌려드립니다.'
'나는 잠을 잡니다, 그런 다음 다시 노를 젓습니다.'
'신들이시여, 하나의 신이 아니라
바다가 부수어버린 한 인간으로서
심판하여 주소서'
보르헤스는 그렇게 우리의 지적인 이웃이 되었고 나도 가끔 방문해서 그의 현학적인 이야기를 듣는 사이로
발전했다. 문학과 예술작품에서 등장인물이나 사물, 풍경의 매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다면 사람들의
관심 속에 살아남게 된다. 그런데 이야기꾼이 아닌 보르헤스는 무엇인가?
시인이고 작가이며 평론가이다.
아니, 20세기의 패러다임을 바꾼 인물, 탈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 소설을 죽음에서 구해낸 작가, 현대 환상문학의 거장 등등 거창한 수식어가 붙어있다. 위대한 작가라고 하지만 그에 대해 실제로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선 그가 누구보다 많은 책을 읽었고 인류의 소중한 유산으로 그 정신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에
주목해 볼 수 있다. <만리장성과 책들>에서 始 황제는 자신의 제국이 덧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장벽을
둘러치려 했고, 책들이 우주 혹은 각 개인의 양심이 가르쳐 준 모든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책을 없애버리려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단어의 어원을 찾고 정확한 표현을 추구하는 작가에게서 세세하게 인용하는 작품과 문학가들, 철학자들의 이름과 사상을 직접 확인할 때, 읽었던 책을 다른 차원에서 해석해 줄 때, 나는 기쁨을 느꼈다.
이를테면 결정론자와 자유의지 옹호론자 사이에 전개된 논쟁의 역사를 다루려 한 책을 언급하면서 접근 방법이 잘못되었거나 부적절하다고 하는 1부의 <평론>에서 보에티우스가 나온다. 헌 책방에서 우연히
구입하게 된 책 <철학의 위안>을 읽고 기억에 남았었다.
"보에티우스 덕분에 신학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느님의 섭리를 우아하게 화해시킬 수 있었다."
내용이 궁금하지만 일일이 찾아볼 수도 없는 작품들과 잘 모르는 작가들까지 친절하게 예시하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니까 호기심이 생긴다. 그를 만나면 풀리지 않는 의문들과 모든 생각들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정리해 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그는 세계문학과 언어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고 평가되는 <픽션들>의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고를 한다는 것은 차이를 잊는 것이며, 또한 일반화를 시키고 개념화를 시키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책을 읽으면 그동안 알았던 것이 매우 단편적이고 불안정한 것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그는 '무한성'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사람이다. 그가 관심을 갖는 거울과 미로, 도서관, 시간과
공간, 영원성, 꿈, 상대성 등 여러 주제들 가운데 가장 나를 사로잡는 것은 '영원성'이다. 책의 서두에서 영원을 시간의 연속성이라는 견디기 힘든 압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훌륭한 '기교'라고 규정하는 데
공감한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상상력)과 사유가 창조한 문학적 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헤아리기 어려운 무한자, 신의 영역이기도 하다는 여지를 남긴다. “영혼의 지리는 기억에 있다."라고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투스가
밝혔던 대로 그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개인의 정체성은 기억에 자리하며 이 기능이 없어지면 백치가 된다. 우주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생각할 수 있다. 영원성이 없다면, 즉 영혼에 머물다 간 것에 대한 예민하고 비밀스러운 거울이 없다면, 보편적 역사는 잃어버린 시간이다. 우리의 개인사는 그 보편적 역사에 속하니, 우리는 거북하게도 유령이 되고 만다."
그의 눈이 멀게 된 것도 보이는 세계를 증식시키고 허상을 사실인 양 일반화시키는 세상 풍조에 역행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운명인 것 같다. 물질적인 한계를 갖고 살아가는 인간의 몸이라는 실존이 그로 하여금 인간의 근원성과 삶의 의미를 전체 속에서 보고 깊이 천착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처하든
생을 인정하고 즐거움과 아름다움, 진리를 찾는 인간의 모습을 책과 문학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다. 그는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것을 연관 지어 사유한다.
"영원한 것은 유한한 것이다. 유한한 것의 다른 면이고 반대이기도 하다. 영원한 것은 만질 수 없고 사라질
수 없는 무엇이다. 시간의 흐름은 결코 이러한 영원의 실체에 영향을 줄 수 없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에게서 '영원성'의 개념을 발견했다. 존재의 행위 가운데 모든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요소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존재를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라고 한다면 영원'은 과거, 현재, 미래를 일소하는 것이다. 인간은 오래 살기를 바라고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정말 자기가 원하고 바라던 것이 이루어질 때
죽어도 좋다고 한다.
"영원이란 바로 오늘이며, 무한한 수의 사물에 대한 직접적이고 찬란한 향유이다."
과거 바로크 시대 '바니타스'회화에서 정물화를 통해 추상적인 개념을 사물에 부여하려는 시도는 오늘날 개념미술과 설치미술로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시각예술의 외연을 사유라는 활동에까지 확장하는 추세다. 화가의
시선처럼 그는 인간과 삶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선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진실은 단순하지 않고 항상 복잡한
것이다. 그래서 진실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진정 무언가를 발견하는 여행은 ···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이다."라고 프루스트가 말했듯이 보르헤스의 책은 우리가 향토색을 떠나 상상하고 생각하는 광활한 인식의 여행으로 이끈다.
그는 수 세기에 걸쳐 축적된 지식을 존중하고 창조적 모험을 즐기는 태도와 열정도 함께 전해준다.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한 신화와 문학작품이 허구 일지 모른다. 형이상학적 문제들이 실제적인 것과 무관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보르헤스가 사랑한 책과 문학은 앞으로 계속해서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소프트웨어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가 탐구한 인간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는 시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는 <케닝>에 나온 목록 중 '미래에서 온 시든 꽃'이 적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