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지도 않은

<캉디드> 볼테르

by 명규원

정 지용의 <향수>란 시가 노래로 만들어져서 듣기에 좋았다. 가보지도 않은 시골마을의 풍경이

떠오르면서 내 삶의 경험인양 실개천 흐르듯 적셔진다. 가수 이동원이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라고 노래할 때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바리톤 박인수의 미성과 함께 듀엣의 조합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렇듯 아름답게 펼쳐지는 시인의 고향에서 다가온 가사의 한 대목은 가슴에 꽂힌 지 오래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시인의 눈을 마주치며 귀 기울이고 그의 사소한 분위기에도 자신을 온전히 주었을 진중한 여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나 자신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아니 그녀는

나보다 더 순수하고 강인했을 것이다. 말없이 집안의 허드렛일을 해치우고 소박한 밥상을 정성스레

차린다.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이 있었다면 그 곁에서 또한 기쁘고 뿌듯한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비록 가난하고 고단한 삶일지라도 그녀는 시인이 아끼는 존재였기에 향기롭고 아름다워서 시가 되었다.

그래서 큰 감동을 안겨준다.


「캉디드」는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가 쓴 소설이다. 그는 135권이나 되는 저서를

남겼지만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는 이 책은 철학적 우화라고 하겠다. 출간한 지 250년도 지났지만

세계문학전집에 빠지지 않고, 여전히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재미가 있다.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소설이란 장르를 택해서 당시 뿌리 깊은 사회적 병폐와 종교적 맹신을 철저히 부정하고자

한 의도가 잘 맞아떨어지는 작품이다. 주인공 캉디드는 남작의 여동생이 낳은 혼외자다. 그런데 남작의

아름다운 딸인 퀴네콩트를 사랑한 죄로 독일 왕국의 작은 성에서 추방되어 전 세계를 떠돌며 온갖 고초를 겪는다.

"도대체 행복이 어디에 달려 있단 말인가!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 것까지도

나를 박해하는구나."


이 소설은 대항해시대의 중심인 리스본이 18세기 중반에 겪은 대재앙과 그로 인해 달라진 세계관의

극적 변화를 담아내고 있다. 서구 문명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 중 하나였다고 한다. 가톨릭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만성절(萬聖節)에 지진으로 인구 4분의 일에 해당하는 2만 5천여 명(20여만 중 3~4만

이라는 설도 있음)이 목숨을 잃었다. 거대한 해일로 타호 강이 범람해서 죽음과 파괴를 더 초래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신앙심 깊은 포르투갈의 도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신(神)이 하는 일을 인간이 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신은 선한 존재이고 이성이 없는 신 관념은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신론(理神論)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낙천주의를 볼테르는 <캉디드>로

통렬히 풍자한다. 천재지변, 기아와 질병, 약탈과 전쟁 등 불합리가 넘쳐나는 세상은 또 한편으로 서로

미워하고 거짓말하는 위선자들로 가득 차 있다. 소설의 배경을 보면 과거나 현재나 삶의 내용은 달라진

것이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무튼 생사의 위기 앞에서도 "세상은 최선의 상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라는 스승 팡글로스 박사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캉디드는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청년이었다.

팡글로스(Pangloss)는 '모든 혀', 즉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는 바로 이신론자(理神論者)인 라이프니츠를

풍자하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로 볼 수 있다. 지진과 폐허 속에 간신히 살아난 팡글로스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 이 모든 것이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리스본에 있는 화산은 다른 곳에 있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사물은 현재 있는 곳 이외의 곳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모든

것이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용기를 낸 캉디드는 결국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 그토록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기나긴 고생 끝에 캉디드가 얻은 것은 소박한 밥상과 세파에 떠밀려 늙고 못생겨진

퀴네콩트뿐이다. 그는 모든 것이 하나의 목적, 최선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팡글로스의 가르침대로

신의 완전성을 믿고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졌으나 불행과 불운의 연속이었다. 코는 안경을 얹기 위해 존재

하고, 돼지는 우리에게 고기를 주기 만들어졌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목적론적 우주론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불행과 악(惡)도 더 높은 차원의 목적을 위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파란만장한 생애 동안 캉디드는

과연 무엇을 위해 애쓰며 살아온 것일까? 어딜 가도 사랑하는 그녀만을 만나길 바라며 끝없는 고생길을

헤쳐나갔는데···.

캉디드의 여행기는 뭔가 제대로 이루어지거나 결말이 나는 것도 없이 '지금은 뜰을 경작할 때'로

마무리된다.

"모든 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네. 만일 자네가 퀴네콩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메리카 대륙을 누비고

다니지 않았다면, 양들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여기서 이렇게 설탕에 절인 레몬과 피스타치오 열매를

먹지 못했을 걸세."

이런 팡글로스의 말대로 고달팠던 인생 여정이 정리될 수 있을까? 그는 스승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아직도 당신의 철학을 믿느냐고 묻는다.

"나도 이제는 전혀 믿지 않지만, 기왕에 그렇게 주장했으니 계속 그렇게 말해야겠지."라고 대답하는

팡글로스의 말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소위 지식인을 자처하는 인간일수록 잘못을 알면서도 스스로

돌이키지 못하고 오류와 우매함 속에 살게 되는 것 같다. 반면 세상을 몸으로 부딪히며 살아온 주인공은 더 지혜롭고 책임감이 있다.

"맞습니다." 캉디드가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의 정원은 우리가 가꾸어야 합니다."


캉디드는 삶에 대한 대답을 얻으려 노승에게 갔다가 얻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가하게 보이는 노인

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일을 하고 있으면 세 가지 커다란 불행이 우리 삶에서 멀어지지요. 그것은 권태, 타락, 궁핍이랍니다."

세상을 경험한 후 캉디드가 스승 앞에서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라고 선언한 것은 유명하다.

적어도 그는 세상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일은 늘 생긴다.

그러나 인간은 역사나 자연의 파괴적인 힘에 맞서 지키고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걱정이 끊이지 않는 역사(세계) 속에 던져졌다는 현실을 인식한 말이다.

그런 인간의 조건을 노동과 창조적 행위로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인간성과 온전한 정신을 보존할 수 있다. <정원을 말하다>에서 로버트 포크 헤리슨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탐구를 하면서 볼테르를

언급한다. 지금 서 있는 곳에 자리 잡기를 해야 하는 인간은 자신의 환경과 관계를 구축하면서 스스로를

정립해 나간다는 실존주의적 입장에 서 있다. 몇 해 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책 가운데 마음에 들어서

최근에 구입했는데 덕분에 청춘기에 읽고도 잘 이해하지 못했던 <캉디드>를 다시 들춰보게 되었다.

책 속에 책이 있다!

신의 뜻과 섭리는 인간이 알 수 없다. 신에게 목적성을 부여한다는 것, 선의 근거에서 행한다고 주장하는

의견에 대한 스피노자의 부정적인 입장을 볼테르도 지지하는 것 같다. 이제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과

스스로의 힘을 통하지 않고 전능한 신에게만 의존해서 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아는 세상이 되었지만.

소설이 쓰였을 당시에나 지금도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하고, 자신의 노동이나 작업으로 먹고사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은 변함이 없다. 삶의 터전을 가꾸고 일상을 유지해 나갈 수 있어야 어떤 사상이나 이상도

실현할 수 있으니까.


신에 의한 최선의 원리가 작용한다는 낙천적 세계관에 대한 수정은 불가피하게 이루어졌다.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도 인간의 각성과 행동이 따르지 않는 종교성을 비판한 것이다. 과연 인간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려 애쓰는 존재라고 볼 수 있을까?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성과 계몽주의에 대한 신뢰도 무너졌다. 그렇다고 세계가 아무 목적도 없이 흘러간다고, 진리조차도 상대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까?

과학적 지식을 공유하고 기술문명이 발달한 현대사회는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허무는 해체주의로 나가고

있다. 인간이 우주의 거대한 맷돌 속에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먼지 한 톨의 신세인데, 그게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물질적 필연성에 매몰되어 부자유한 상태로 풍요를 누리는 데 불과하다면? 오늘날 갈수록

이미지와 환영을 좇고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진실을 존중하려 들지 않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더 많은

삶에 대한 갈망으로 들떠 있으니 오히려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게 되었다.


캉디드처럼, 살면서 누군가를 사랑했거나 사랑한다는 것이 인생에서 제일 소중하지 않을까? 지금 내

가까이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과 일상을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를 느끼기 바란다. 나아가 정원을

가꾸듯이 우리 자신을 가꾸고, 가족을 돌보듯이 국가를 돌보는 자가 되어야겠다. 자유로운 개개인의

생각과 인격이 존중받을 수 있으려면 올바른 제도를 유지하고 관리해 나가는 정치 참여도 필요하다.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라는 대목에서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이 생각난다. 민주주의 시민이란

마치 정원사와 다름없어야 하는 것이다.


캉디드는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 인생의 온갖 우여곡절을 많은 경험을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지나친 비관이나 낙관을 경계하며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만든다. 생생한 등장인물과

주인공으로부터 성숙하고 진실한 인간의 모습을 찾고 이상 사회를 꿈꾸었기에 평론가 브레통은 18세기를

휩쓴 프랑스의 사상 소설 가운데 하나만 내세운다면 서슴없이 이 소설을 들겠노라고 했을 것이다. 또 20세기의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는 앙드레 지드 같은 작가도 “만 권의 세계문학 가운데서 만약 전쟁으로 책 열 권밖에 가질 수 없다면, 바이블과 셰익스피어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볼테르의 「캉디드」를 빠트리지

않겠다"라고 할 정도였다.

숱한 역경을 딛고 돌아온 인생의 여행길에서 캉디드는 격정의 열기에 시들지 않은 이상적인 여행을 가만히

시작한다. 몸을 움직이면서도 정원에서 머무는 고요한 순간에 욕심 없이 담담하게 자신을 만난다. 가고자

하는 방향이 섰고 마음이 진실로 편안하다. 고향의 그리운 사람들과 다시 만나 일상을 살면서 그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느끼게 되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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