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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규원 Oct 26. 2021

나는 결코 무엇이 아니라

무엇이 되어가는 중...

                  

보통의 인간에 비해 예술가나 작가들은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하는 면이 강하다.

예술과 문학, 인생에 대한 고뇌와 성찰로 인해 앙드레 지드도 보편적으로 주어진 세계와 삶의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길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동이 아닌 수동으로 자신의 삶을 표현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전통적인 가치와 인간적인 삶을 겸손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피터 왓슨의

<무신론자의 시대> 지드를 평가한 대목이 있다.


'··· 그는 자신의 마지막 중요한 작품인 <테세우스>를 마무리하면서

"나는 살아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앙드레 지드는 말라르메나 발레리 같은 프랑스 작가와 어울렸을  아니라 니체와 도스토옙스키, 브라우닝, 예이츠,

블레이크에게서도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특히 블레이크의 다음 시구를 즐겨 인용했다고 한다.

                       

                 너는 한 사람이며 더 이상 신이 아니니

                 너 자신의 인간 됨을 사랑할 줄 알라.


그래서 아침에 그이와 커피를 마시며 시작된 책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었다. 며칠 전 다시 발견한

초현실주의 여성 예술가들, 그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미친 윌리엄 블레이크가 다시 지드로 연결되다가

갑자기 푸르른 날의 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시절 나의 정신을 일깨워준 시가 T.S 엘리엇의 <황무지>라면 나의 감각을 살아나게 한 소설은 <지상의 양식>이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나는 지금까지 자네에게 이야기한 그 누구보다도 더한 친밀감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싶네"

나다니엘에게 편지를 쓰듯이 지드가 한 말은 곧 나에게 생동감 있는 육성으로 다가왔었다. 나 자신을

위한 모든 욕망을 버리고 역사의 도구가 되려는 의지를 불태우느라 몸과 마음이 피폐한 상태였다. 살아

있으나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나에게 몸의 모든 감각을 일깨우고, 죽음의 위협을 이겨낸 뒤 완전히

새로운 정신으로 살아가는 기분으로 욕망과 본능, 모험을 통해 생의 환희를 맛보도록 이끄는 복음서였다. 여려서부터 청교도적 금욕주의를 내면화해 온 나는 80년대 초에 혁명가로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나라는 '존재'는 없고 '당위'만 있었다.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려 했으니 나도 말하자면 초현실주의자였다.

 

지드는 인간이나 사물이 개별적인 존재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닌다고 보고, 부적절한 설명이나 논리를 거부했다. 철학과 이데올로기(종교도 포함)는 '세계에 대한 감탄'을 방해하는 것이며 우리가 자아를 하나의 통일적 단위로 보는 것도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자아라고 부를 만한 고정불변의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기억들과 지각들,

  감정들이 목적 없이 떠도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삶이라는 혼란스러운 현실을 직접 경험하고 결단을 내리고 행동하는데 따르는 자기 상실 또는

자기 망각도 때론 필요하다. 바로 '나는 결코 무엇이 아니라, 무엇이 되어가는 중'이라는 말도 즐겨 사용한

이유다.

우리가 외적인 환경의 영향이나 내적으로 타고난 기질과 성향, 재능으로도 결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지드의

생각은 요즘 일반화되었다. 누구나 내면에 있는 자기만의 독특함이 최대한 결실을 맺도록 노력하고,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성취하도록 해야 한다. 꼭 밖으로 드러나는 업적이나 성취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죽기 직전까지 그렇게 살다가 가야 하니 할 일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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