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는 현대 사상에 영향을 미친 몇 안 되는 여성 철학자다. 그녀는 전체주의에 관한 연구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쌓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은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정신과 의사들과 성직자들은 그를 아주 정상적이고 매우 긍정적인
사람으로 발표하면서 오히려 유대인 증오자가 되지 않을 이유가 더 많았다고도 했다. 그런 평범한 인간이 왜 그렇게 잔인한 대량학살의 집행자가 되었을까?
검사 측은 그를 괴물로 몰아가려 했지만 아렌트가 보기엔 무대 위의 광대였을 뿐이다. 아이히만을 광대로 보는 관점은 그와 비슷한 인간들로 인해 죽거나 고통받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아렌트는 유대인으로서 증오나 복수의 감정을 떠나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려 했다. 그는 삶에서
총통에 오른 히틀러의 '성공'을 가장 중요시한 나머지 그 한 면만 보고 복종해야 할 충분한 근거로 삼았다. 인간으로서 양심이나 법 자체를 따지지 않고 단지 의무에 충실한 사람이 된 것이다.
명백한 가치를 지향하고 의미를 추구하는 경향을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지닌 것일까? 삶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과 길이 잘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무도덕해진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선과 악에 대한 개념 자체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진실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전체주의 사회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면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악마의 하수인으로 변한다.
아렌트는 제2의 주저인 <인간의 조건>에서 '만인 투쟁'의 사회관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인간이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주체적 결단이 필요하다. 위정자는
권력을 위임받은 것에 불과하다. 모든 사람이 정치와 같은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있는데, 조건이 있다.
'평등성'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따라야만 한다. 즉 공적 공간에서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관심은 사전에 배제되어야 한다. 공적 공간에서 중요한 것은 주권이 아니라 '자유'다. 사회는 매끈한 방석과 같은 통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의 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적 공간에 참여하는 것은 공간의 평등성을 유지하려고 의도하는 것과 같다.
공공성은 다양성뿐 아니라 시민이 주체가 되어 인간다움과 민주주의 회복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점점 개인이 진실을 찾아나가기가 어려운 사회가 되고 있다. 거대 언론과 미디어 파워가 독점적인 상태에서는 개인이 떼거리로 주저앉게 된다. '만들어진 신'처럼 어떤 의도에 따라 편집된 사실을 사람들은 믿게 되어 있다.. 그 결과 현대 사회의 악은 모든 가치와 문화를 상대화하고 무한 해체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커지고 있다.
오늘날 과거에 공통으로 존재했던 세계(공동체, 권위, 전통)를 상실한 인간들은 어디를 가든지 오로지 자기 자신과 마주 서는 상황에 이르렀다. 우리를 안전하게 이끌어주던 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개개인의 정신과 영혼이 더욱더 중요해졌다. 한나 아렌트는 '생각하는 힘'이 인간의 다른 능력에 비해 가장 약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확장된 사유의 방식이 필요하다는 점은 오늘날도 유효하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대로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으로 존재하가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본성을 화복 해야 한다. 윤리나 도덕의 기준,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은 우리 정신과
영혼이 세상과 긴장을 유지하면서 만들어져 나와야 한다. 조직화된 무리가 이해관계에 따라 좌지우지하는 세상이라면 그 집단이 원하는 것은 선이고 미워하는 것이 악이 된다.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실이나 진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정의'란 적과 동지의 구분을 떠나서 모든 인간에게 동일해야 한다." - 소크라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