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의 심연

<인간의 심연> 그레이엄 그린

by 명규원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사랑, 고통, 외로움, 상실감, 슬픔, 그리움 같은 것이 인간에게 있다.

그래서 나이가 들고 인생을 조금 알아가면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소위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않고 삶에서 부딪히는 뜻하지 순간들도 받아들이고 묵묵히 견딜 수

있게 된다. 눈에 보이는 현상의 요란한 혼잡스러움에 매혹당하여 마음이 혼미해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도 제정신을 차리게 만든다. 모든 상황에 대해 마음이 한없이 들뜨거나 당황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무게 추와 같은 '심연'이 인간 안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많은 문학작품과 예술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도 이러한 심연이 있다.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은 ’허무’의 느낌이 스치더라도

심연을 보지 않고 살아간다. 심연은 위험하고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아득한 심연은 ‘숭고'의 미와

연결되어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풍경화 같은 독일 낭만주의 회화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심연이 내적인 공허감과 연결되면 추락할 수 있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추락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법이다. 아멜리 노통브의 <오후 네 시>에서 에밀이 한 말도 심연을 인식한 것이 아닐까?

"사람은 자기 안에 정체되어 있는 커다란 덩어리를 갖고 있지. 삶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잃고 체념하게 되는 순간, 그게 밖으로 나오는 거야.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희생물일 뿐이야."


영국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한 사람인 그레이엄 그린은 인간의 내면에 혼재되어 있는 선과 악, 나약함과

위대함을 들여다보았다. 그 누구도 단편적으로 일관되게 모든 것을 심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환경에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사람과 철저하게 매몰되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사랑하던 사람 사이의

권태도 심연이 된다. 그는 <인간의 심연>이란 소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죽어가는 환자들을 수용한 난민 수용소도 환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야경을 멀리서 바라보면

평화스러운 인상을 받을 것이고, 맑은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 아득하고 안전하고 자유스러운 인상을

받을지 모르지만 그 본질을 알고 나면 이런 인상들이 얼마나 맹랑한 것이었나를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사건이든 사물이든 모든 것은 인간의 인식을 거쳐 파악되는 것이고 인간과의 관련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사물의 본질이란 다름 아닌 인간 실존의 본질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행복이다, 정의다, 사랑이다 하고 자칫하면 안이할 정도로 통념화되고 있는 상념들도 인간 실존의

밑바닥까지 파고 들어가서 각도를 달리해 볼 때 과연 지금까지 우리의 규정이 타당한 것이었을까?

행복에는 불행이 있고, 정의에는 불의가 있고, 사랑에는 미움이 있다. 인간은 이 역설 속에 실존하고 있다."


그는 인간성의 심연, 양가(兩價) 적인 도덕, 현대 사회의 모호성과 정치, 성, 범죄, 종교, 세계정세, 언론

등 20세기 주요 화두를 작품으로 쟁점화했다. 소설이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 작가로 기억된다. <The Glory and The Power>는 정치이념과 종교, 인간의 구원이란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다. 멕시코 군사혁명 당시를 배경으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현실감 있다. 신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불완전하고 분열된 사람들이 자신의 고결함과 믿음의 토대를 극한까지 시험받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과 비겁함, 절망에도 불구하고 막연하게 터득한 신의 선함이 존재하고 인간은 진정한 모습에

도달한다. 필사적으로 도주하던 위스키 신부는 고통과 죄악이 어쩌면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지도 모르겠다고 깨달아간다. 그래서 심연에 마주할 용기를 내고 체포되어 처형된다.

"고통이 쾌락의 한 부분이듯, 지상은 천국의 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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