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각 모형

<이야기의 탄생> , 윌 스토

by 명규원

하루하루의 삶이 혼란스럽고 암울한 현실 속에 있을지라도 지속되는 이유는 뭘까? 우리의 뇌가 단순하고

희망적인 이야기로 바꾸며 근사하고 소중한 나를 주인공으로 삼아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누구나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여긴다. 주위를 둘러보면 부끄러운 짓을 한 사람은 물론

어려운 형편이나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나름대로 우월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알고 보니

뇌에서 생성된 환각의 세계 덕분이다.

뇌는 실제 현실과 직접 접하지 못하므로 현실을 실제로 경험하지도 못한다. 감각기관이 외부세계의 다양한

형태의 단서와 신호를 포착하는 기능을 하더라도 제한적인 정보를 전달하는데 뇌는 현실 세계를 재현한 환각 모형으로 현실을 구축한다. 하나의 대상을 보거나 감각할 때 그 대상이 연상시키는 모든 것을 함께 느끼는

것은 신경계의 환각 모형이 작고 개별적인 것으로 저마다의 과거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신경망이 활성화

되는 연상 작용이 있기에 문학과 예술, 시의 힘이 나오는 것이다.

방대한 양의 정보를 처리하고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얻으려 하는 뇌의 활동에 대한 연구(어느 한순간에 약 1100만 비트를 처리하는데 의식에서는 40비트 이상 인지하지 못한다.)가 진행되어 비교적 최근에 진화한

'신피잘'의 기능이 밝혀지고 있다. 이마 안 쪽에 얇고 길이가 1m쯤 되는 막이 한 겹으로 접혀 있는데 사회적 관계를 끊임없이 기록하는 것이다. 이 기능은 사람들의 몸짓과 얼굴 표정을 해석하도록 도움을 주는 마음

이론에 해당한다. 신피질은 사람들에 관한 정보를 처리하는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을 세우고 추론하고 수평적 연결과 같은 복잡한 사고도 담당한다. 심리학자 티모시 윌슨은 다른 동물들과의 치이에 대해

"인간에게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이유에 관한 정교한 이론과 설명을 구축하는 능력이 뛰어난 뇌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론과 설명은 주로 이야기 형식을 취한다. 뇌는 뒤죽박죽인 현실을 인과관계로 연결시켜 단순한 논리로

재구성한다. 종교는 현실에 대한 심오한 질문들, 생명의 기원과 선악의 문제, 사후의 세계 등에 답을 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난해하고 무질서한 이야기를 이해할 만한 서사로 바꾸는 작업은 스토리텔링 뇌의 핵심 기능이다. 변화를 감지하는 지각은 통제력을 얻고 세계를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허구의 인물로

마음이 만들어낸 불완전하고 편향되고 고집스러운 창작의 산물이다. 사람 머릿속에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모형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다양한 모형(고상하고 이타적이며 도덕적으로 올바르다는 등)도 들어

있어서 주도권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행동은 그 최종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오랜 세월 욕망과 중독에

시달리다 젊음을 유지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중년에는 음식과 싸운다니...!)

문제는 사람이 변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세계에 관한 인식과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범하는 실수는

단지 우리가 이런저런 일들에 관해 생각하고 간단히 공감하거나 무시하기로 선택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신경과학과 심리학에서 정확히 통찰한 대로 결함이 우리의 환각 모형에 스며들고 지각의 일부와 현실에 대한 경험을 이루므로 우리 자신에게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수정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설사 볼 수 있다고 해도 흉이 아니라 미덕으로 여긴다면?

자신의 결함을 스스로 인지하고 변화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해의 토대가 되는 '신념'은 곧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뇌는 우리가 모든 면에서 옳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편향과 오류와 편견이 진실처럼 보인다.

<남아있는 나날>에서 유능한 집사로 인정받는 스티븐스의 핵심 신념과 세계를 통제하는 방식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일에 열성을 다하고 아버지나 자신과 같은 집사들을 훌륭하게 만들어

주는 '특별한 자질'에 대해 생각한다. 그 답은 '품위'이고 품위는 '감정 절제'에서 나온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의 결론에 따르면 영국의 풍경이 아름다운 이유는 '절경이나 장관이 없어서'이듯이 위대한 집사는 '바깥의 사정이 아무리 놀랍거나 염려스럽거나 성가시더라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야'한다. 감정 절제의 미덕 덕분에 영국인이야말로 최고의 집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감정 절제는 세계에 대해 스티븐스가 구축한 신경

모형의 주축이자 통제 이론인 셈이다. 작가 이시구로는 고도의 집중력으로 자신의 결함을 신중히 감추는

인상적이고 친밀하면서도 강렬한 인물인 스티븐스의 결함 있는 현실 지각이 자신에게 어떻게 해를 입히는지

조심스러우면서도 가차 없이 폭로한다.

스티븐스는 아버지의 임박한 죽음을 알면서도 곁을 지키기보다 집사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영국에서 가장

훌륭하고 품위 있는 집사의 반열에 오른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긴다.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수치와

회한의 기억이 아니라 승리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감정 절제라는 신성한 가치에 대한 신념 덕분에 집사로서 경력을 쌓고 지위를 얻고 아버지를 잃은 고통에서 보호받았으니 그의 신경계가 뒤틀리긴 했지만 현실에 대한 모형과 통제 이론이 제대로 작동하긴 했다. 다행히 반추하는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결함과 파장을 진실하게

탐색한다. 작가는 그가 삶을 쌓아 올린 토대가 되는 신념으로 인해 어떻게 스스로 무너지는지를 깊이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위대한 작품이라고 저자는 평가한다. 왜 스티븐스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진실과 진심에 다가가지 못하는지 궁금했는데 이 책을 통해 풀렸다.

역사적 상황에 대응하는 인간의 내면에 대한 이해를 심도 있게 다룬 문학작품들을 다시 새롭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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