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와 세잔을 생각하며
꽃피는 봄 4월이다. 꽃핌은 아름다운 과정이자 사랑스러운 순간이다. 꽃을 보고서야 나무를 알아보게 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비생산적이고 잠시 지속되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바람에 날리고 시들어버리는
꽃핌은 허무하고 가슴 아픈 현상이다. 어쩌면 시간 낭비인 것이다.
과연 그럴까? 소란스럽고 부산한 하루, 속도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 현대의 삶이다. 일상성 속에서 우리는
성찰할 시간도 없고 주도성을 발휘하거나 숙고하여 의사를 결정할 기회가 거의 없이 떠밀려 가는 것 같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편리함을 누리고 있지만 빅 테크, 빅 머니, 거대 언론을 통해 세계를 조작하고
통제하려는 세력들을 벗어나기 어렵다.
문명과 전통적인 가치를 부정하고 해체시키려는 진보적 이념이 학문과 교육의 영역을 장악한 것도
큰 문제다. 세대 간 단절이라는 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생각과 행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를 식별하고 개인 간의 소통이 활발해지면서 개개인의 의식도 그만큼 깨어나고
성장해 나가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의 변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백여 년 전 비슷한 위기의식을 지녔던 릴케는 분열된 인간과 자연 사이를 분열 이전으로 돌리는 일을
자기 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기능 위주의 기계가 굴려가는 문명에 의해 잉여가 되어버릴 위험에 처한
모든 것을 내면화하고 언어로 바꿔놓는 행위가 시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특출한 시인이었다.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여행을 많이 다녔으며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친구가
되었다. 삶 전체의 영역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한 채 전적으로 오로지 시인으로 살았다. 고독과 외딴 풍경의
진가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이 주는 위안이란 대부분 인간 자신 속에 ‘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리의 눈이 좀 더 잘 보게 되고, 우리의 귀가 좀 더 잘 듣게 되고, 우리가 과일의 풍미도
좀 더 온전히 느낄 수 있고, 더 많은 냄새를 참을 수 있고, 더 침착한 정신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가장
즉각적인 경험들로부터 더 확실한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릴케가 시를 통해 표현하려 했던 것은 세잔이 회화에서 먼저 시도했던 바와 다르지 않다. 바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제대로 알아보는데 방해가 되는 관행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무엇도 거치지 않은 직접적인 방식으로 자연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고향 엑상 프로방스에 머물며 주변의
외딴 풍경을 통해 자연의 충만한 경험을 그림으로 나타냈다. 감각적인 인상에 충실하면서도 단순하고
명료한 형태에 집중한 세잔은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전통적인 수법 어느 하나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무에서 새로 출발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 결과 대상의 형태나 고유 색,
윤곽선에서 자유롭고 작가의 주관적인 관점과 주제 의식을 표현하는 미술의 새 장이 열렸다.
현실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가지고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 힘을 기울이는 것이 시인이나 화가와 같은
예술가의 영역일까? 일시적인 행복보다 예술에 대한 성취를 열망하며 살아가는 것은 삶에 이르는 지름길과 정반대 일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온전한 정신을 지녔다면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자세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개개인이 자신의 오류를 수정하고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멈춰서는 안 될 목표다. 힘들지만 우리가 온전한 정신으로 진정한 삶을 살려고 할 때, 어떤 상황이 닥쳐도 희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