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담 스토리>
"엄마, 영화 보실래요? "
내 취향을 파악한 아들이 가끔 TV에서 무료 영화를 골라 주었다. 바로 그 '중이병'이었을 때,
밤에 게임을 맘 놓고 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한 일이다. 험프리 보가트나 오드리 헵번이 나오는
<사브리나>, 혹은 <애정의 행로>처럼 옛날 영화가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스토리 전개와 배우들의
연기가 흡입력이 있어서 어느새 빨려 들어 정신을 못 차린다. 한 주간 새로 시작하기 전 명화극장을
꼭 봐야 했던 시절, 내 안의 아이가 살아나서 그렇게 만든다.
감독/사무엘 벤쉬트리, 출연/이자벨 위페르, 마이클 피트, 구스타브 드 케르베른, 개봉 2015. 12. 24.
이번엔 비교적 최근 영화인데 분위기는 사뭇 비슷한 <마카담 스토리>였다. 시대의 변화가 무디게
느껴지는 프랑스 변두리 지역 공공 주택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가장 안 어울릴 것 같은
사람들이 뜻밖의 만남을 통해 조금씩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게 된다. 이 낡은 아파트에 이사 온
중년 여배우 잔 메이어 역으로 이자벨 위페르가 나온다. 옆집에 어머니와 단둘이 살면서 늘 혼자
남겨져 있는 십 대 소년으로부터 도움을 받지만, 다른 사람의 호의에 고맙다는 말도 못 하는
'프렌치 시크' 그 자체다. 당당함과 우아함을 지닌 왕년의 여배우이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젊어서 찍은 영화를 같이 보고서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된 소년과 가까워지자 아들을 잃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 어머니로서의 내면을 가만히 드러낸다. 차갑고 무심한 표정의 잔 메이어는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온 소년을 진심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소년을 통해 상처를 치유받은 것일까?
소년의 충고도 받아들이고 연기의 틀을 벗어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첫 장면에서 고장이 잦은 엘리베이터를 새로 들이는데 각자 비용을 부담하자는 아파트 주민 회의에서
유일하게 반대한 비호감 중년 남성의 이야기도 있다. 2층이라 사용할 필요가 없다던 그는 집안에서 무료한 삶을
혼자 보내다가 사고로 다리를 다친다. 남의눈을 의식해야 하는 처지라 밤에 몰래 엘리베이터를 타고
휠체어로 이동해서 음식을 구하러 나선다. 아뿔싸, 마트는 이미 문이 닫혔다. 근처 병원에 가서 고작
자판기의 간식을 먹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신세가 된다. 그러다가 담배를 피우며 잠시 쉬려고 나온
나이트 근무 간호사와 몇 마디 주고받고는 반해버린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를 평생 고대했던지 영화의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사진작가 행세를 하며 접근한다. 고립된 채 살던 스테른 코비치의 무료한 삶에 변화가 생긴다.
오래된 카메라를 꺼내어 하늘을 좋아한다는 간호사의 말에 창밖으로 하늘을 쳐다보며 사진을 찍는다.
그러자 갑자기 이상한 물체가 출현하면서 다른 인물들이 연결된다. 우주로부터 아파트 옥상에 불시착한
후 정체를 숨기고 구조를 기다려야 하는 미국 나사의 우주 비행사라니! 우주복 차림의 당황한 존 메켄지는 알제리 출신의 아주머니 집에 잠시 기거하기로 한다. 말이 서로 통하지 않으나 손짓을 해가며 소통하고 감옥에 간 아들에게 해 주듯 어머니의 따뜻한 요리, 쿠스코를 대접받는다. 물론 그도 아들 대신 고장 난
싱크대를 고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모든 시작은 불시착"이라는 사무엘 벤쉬트리 감독의 말대로 고립된 채 서로를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예상치 못한 특별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면서 소통한다. 텅 비고
쓸쓸한 풍경에 웃음조차 없는 인물들이 따뜻한 온기를 나누게 된다는 결말이다. 출연한 배우들의 연기가
다 좋았고 이자벨 위페르의 완벽한 연기가 돋보였다. 얼마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마카담 스토리>에서 모티브를 얻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쳤다. 드라마틱 한 감동이나 반전이 없이
흘러가지만 상황의 설정 자체가 정말 흥미 있는 영화였다.
('몽상가들을 위한 이상적인 영화'라는 <르 파리지엔>의 표현대로라면 나도 몽상가!)
우리는 그동안 집단의식과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중요하게 여기는 풍토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공동체로부터 인정을 받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아무리 바람직하다고 해도 공동체의 삶은
개인이 욕망을 경험하는 것에 비하면 그 매혹과 성취감에 있어서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이런 사실을
이 영화가 극명하게 보여준다. 밤에 간호사를 촬영하기로 약속했던 스테른 코비치는 갑자기 고장을
일으킨 엘리베이터에 갇히게 되지만, 가까스로 아직 회복되지 않은 다리로 일어나서 빠져나온다. 그녀를
꼭 만나야겠다는 일념으로 죽을힘을 다해 걸어간다. 그의 로맨스는 망상일까? 진정한 사랑을 향한
맹목적 의지에 감동...!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품은 욕망은 공동체와는 상당히 다른 경험이다. 자기 자신을 벗어나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쏟고 서로를 결속시키려는 사랑의 힘(욕망)은 신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시작은 우연히, '불시착'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