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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규원 May 05. 2022

코기토와 신에 대한 의식

<바로크와 '나'의 탄생>, 윤혜준

(데카르트의 <성찰>)

바로크는 서양의 한 시대((16세기말에서 17세기) 반종교개혁과 가톨릭의 부활, 절대왕정이라는 특수한

조건들이 만들어낸 문화, 예술, 사상의 경향과 구조를 지칭한다. 르네상스처럼 인간을 이상화하지 않고

인간을 있는 그대로, 원죄로 인해 망가져 있을 수밖에 없는 일그러진(‘바로크’한) 존재로 본 측면이 있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인간상을 인정하고 하느님 앞에 엎드릴 때 은총으로 일순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복음을 전한다. 바로크 시대 ‘나’의 에너지는 ‘나 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바로크적인 우울과 허무 속에

있는 ‘나’는 동시에 절대자 하느님을 의식했기에 개인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이 아는

철저히 '나'만의 세계에도 하느님은 있다. 아니, 오히려 양심과 함께 신을 더 의식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영혼 전체가 악으로 기울어 있기 마련인 인간이 선한 의지를 갖는다는 것은 순전히 은총 덕분”

이라고 종교개혁자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말한다. 믿음은 은총이고 하나님의 일방적 선물이라고

할 때 나의 믿음이 진짜인가? 철저한 회의로 해결해 보려는 데카르트의 <성찰>은 생각하는 존재로서

인간 ‘나’를 인식한다. 나의 신체와 감각을 포함한 모든 대상의 ‘있음’을 의심하는 순간 생각 속에서

그러한 의심을 하는 ‘나’는 분명히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생각하는 어떤 것’으로서 존재하는

나의 생각은 참인가? 그것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나’가 아닌 초월적 존재가 해주어야 한다.


우리가 근대적 인간 이해로 주체를 확립한 것으로 아는 '코기토'(사유하는 '나')는 실재의 원인인 신을 매개로 하여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증된 것이다. 의혹과 불안으로부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이

탄생한 배경에 데카르트가 신을 부정했다고 보면 큰 착각이다. 데카르트가 인식하는 모든 것들을 의심하는 대상으로 삼는 그 세상을 인간이 만들지도 않았고 ‘생각하는 나는 있는 나이다’는 생각도 자신이 만든 것은 아니다. 만약 “내 생각 중에 어떤 것이건 그 객관성이나 사실성이나 완결성”이 워낙 뛰어나고 분명하다면, 그 생각의 원천은 의혹과 회의에 시달리는 ‘나’ 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 말고 또 다른 존재가 그러한 생각의 원인으로 존재한다."라는 증거가 된다. 감각적 세계, 내 신체, 외부 대상 모두를 철저하게 회의할 수 있는 ‘나’는 절대적 ‘무’를 사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절대적 무한성을 사유할 수 있다. 나아가 ‘나’는 절대적 하느님의 존재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내가 의심하고, 뭔가 내게 부족함을 인지하고 이를 아쉬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눈에 보이는 실상이

허상일 수 있다는 의심은 왜 하는가? 그것은 보다 높은 차원의 실체, 보다 완벽한 존재의 가능성을 감지

하기에 가능한 것 아닌가? 데카르트는 ‘하느님’이란 말을 무한하고 영원하고 불변하고 독립적이고 전지

전능한 실체로 이해한다. 나와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이 존재한다면, 그로 인해 창조되었다고 생각하는 해

실체인 것이다. 나는 불완전한 속성인데 하느님에 대한 개념이 내 정신 속에 들어올 수 있음을 보면 완전

하고 모든 결함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있음을 인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데카르트적 ‘코기토’에서 신으로부터 독립하여 인간 이성에 합당한 세계를 구축하려는 의도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말았다. 서양철학은 존재론을 출발점으로 "나는 생각한다"에서 지식과 앎은

대상을 조종할 수 있는 나의 '자유'와 '힘'의 행사가 되어버렸다. 인간은 인격적 개체로서 고유한 의미를

상실하고 익명적 질서의 부분이 되었다. 바로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은 전체성 속에 개체로 흡수된

타자의 비극, 데카르트가 주체로서 나를 자각할 때 신을 전제한 것과 다른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그의 <성찰>에서 ‘나’의 ‘있음’은 기껏 의심의 능력이라는 외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것이었는데···!

아무튼 우주와 물리를 수리적으로 탐구하고 계몽주의의 원조로 숭배되는 과학자 데카르트는 인간의 불완전함과 한계를 창조주 '설계자'의 부실공사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의 자유(의지) 탓으로 돌린다. '의지력'이나 '인식력'은 하느님이 준 선물로서 그 자체에 결함이 있을 수 없지만 기만당하고 허위에 빠지는 이유는 인지력의 한계에 묶어두기 어려운 의지력 때문이다. 그는 생각이 감각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다음 세기에 칸트는 제한적이고 자기비판적인 이성주의를 철학의 방향으로 삼았다.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말하듯 바로크는 지금, 여기의 문제다. 역사는 일회적이고 역사적 사실은 유일성이

그 특징이다. 그러나 연속성과 유사성도 역사의 속성이라는 점에서 역사는 '반복'한다는 것이다. 인간성과

인간 조건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크는 과거의 이름이지만 여전히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자신의 재능에 도취하고 투지와 야망, 욕망, 기교, 기술, 도전, 도발 등 ‘르네상스’적 유산을 물려받았다. 또 동시에 그 폐해와 모순, 잔해와 파괴를 목도하는 ‘바로크’적 국면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절대자 앞에 선 인간의 타락과 한계를 인정하는 ‘바로크’적 가치는 이 두 축 간의 갈등과 대립에 담겨 있다.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계몽주의나 합리주의적 시도만을 서구 근대사상의 주력으로 받아들일 때, 또 그것을

비판, 전복, 대체했다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현대 사상들에 의지해서 과연 우리를 압도하고 위협하는 많은 문제들에 대응할 수 있을까? 모든 가치와 질서를 해체해 버리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지식의 발전과 세상살이를 통해 빛과 어둠을 명확히 나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르네상스와 바로크도 불가분의 관계다.


무엇보다 바로크는 ‘개인’의 각성이 일어났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바로크는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가 다시금 개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새롭게 만날 수 있도록 해준다.

집단에 속한 내가 아니라 개별화 과정을 통해 개개인의 영혼을 지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야 주체적인 '나'와 '나의 관점'을 지니게 된다. 개인의 관점은 올바른 것을 찾아나가는 주관적 에너지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 세계를 가지게 된 바로크는 지금도 유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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