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 DVD방에서 그 시절 남자친구와 영화 노트북을 참 감명 깊게 봤었다.
영화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노트북은 노부부가 함께 생을 마무리하며 ‘세속적 성공을 이루지 못했어도 깊은 사랑을 했기에 성공했다’고 말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시절 나는 그 절절한 사랑 장면을 보면서도 우울감을 떨칠 수 없었다.
아마 나는 저런 사랑을 가질 수 없다는 걸,
원해도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라라랜드를 봤을 때도 엔딩 크레딧에서 쓴 감정이 올라왔다.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왜 함께할 수 없단 말인가.
어째서 헤어져야 한단 말인가.
설명할 수 없는 고통과 혼란이 내면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나는 연애할 때마다 늘 진심이었다.
누군가를 사귈 때마다 나의 원래 모습이 옅어져도 괜찮았다.
오히려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것이 기뻤다.
하지만 그만큼, 헤어질 때마다
나는 과거의 나와도 함께 작별해야 했다.
다시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일을 반복했다.
지금의 나는 35살.
결혼 4년 차, 연애로는 7년이 되었다.
이제야 에리히 프롬이 말했던
“Immature love says: I love you because I need you”
라는 문장을 알 것 같다.
나는 예전 연애에서 자주 다투었고,
그게 서로에게 맞춰가는 방식이라고 믿었다.
지금와서 되돌아보니 많은 경우에,
내 안에 충족되지 못한 ‘낭만적 사랑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
상대를 바꾸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래도 다행히 이제는 안다.
내 배우자는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신도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나와 함께하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걸 머리로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는 결혼을 했지만 사실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남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면
그것이 실로 감사한 축복임을 이제는 안다.
사람은 계속 성장한다.
그래서 우리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자랄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어린 시절, 떡잎이 겨자나무일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은행나무였던 것처럼.
만약 서로의 성장이 더 이상 맞물리지 않는다면
그 인연은 거기서 멈추는 것이 서로에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섞여서 땅으로 함께 돌아가는 것도 낭만적이지만,
나는 이 세상에 온 이상
내 삶을 충만하게 살아갈 의무가 있다는 것도 안다.
난 요즘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낭만적인 사랑을 내려놓고 나니
남편의 존재가 내 삶을 윤택하게 해줌이
훨씬 더 또렷하게 보였고 감사하기가 쉬워졌다.
그리고,
내 존재가 더 선명히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