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 맞혀서 뭐하게, 다음 시험이면 다 까먹으면서
작가 소개
안녕하세요. 공군 비행단에서 복무 중인 의과대학 학생입니다. 늦은 나이 입대해 재학 중 가까이 못한 책들을 맘껏 읽고 있습니다. 책장을 넘기며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고 글로 남기고자 펜을 잡았습니다.
사진 한 장, 편지 한 줄 남기기 어려워하던 저지만, 제 속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나누는 일이, 읽는 분들께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저에게는 깊은 깨달음이 되는 일이라 믿습니다.
2025년, 한국 의대 교육은 지금도 '많이 외운 의사'를 뽑고 길러내는 시스템이다. 그 사이 세계 의학교육은 '어떻게 사고하고 결정하는가'를 중심으로 급격히 방향을 틀었고, 최근에는 LLM 기반 AI가 국가시험 문제를 통과하는 수준까지 올라오면서 암기 중심 교육의 한계가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1][2][3][4]
1. 미국은 토론장, 우리는 공장
하버드 의과대학은 이미 수년 전부터 커리큘럼의 중심을 'CBCL(case-based collaborative learning)'과 플립드 러닝으로 옮겼다. 학생들은 강의실에 들어오기 전에 짧은 개념 영상과 자료를 보고 기본 지식을 스스로 익히고, 수업 시간에는 4~6명 팀 단위로 케이스를 토론하면서 진단·치료 전략을 짜고 서로의 사고 과정을 검증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무엇을 아느냐"보다 "새로운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을 전개하고 문제를 푸느냐"라는 점이다.[2][3][5]
반면 한국 의과대학의 주류는 여전히 교수 단상 아래 빽빽한 슬라이드, 그리고 시험 직전 요약집을 붙들고 밤새는 패턴이다(의대생 밤샘 브이로그..이제 그만 보고싶다). 학생이 스스로 질문하고 임상적 상황에 지식을 적용하는 훈련보다는, 이미 출제 패턴이 정해져 있는 문제은행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소화하느냐가 성적을 좌우한다는 인식이 뿌리 깊다. 이 시스템에서 '사고하는 법'을 배우는 학생은, 제도가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 스스로 다른 경험을 찾아 나서는 소수에 불과하다.[6][7]
2. 교수들이 교육에 힘쓰지 못하는 이유
의대 교수 개인의 성실성 문제로 돌리기에는 구조가 왜곡되어 있다. 한국 대학병원 시스템에서 교수의 평가는 진료 수익과 논문 실적에 압도적으로 매여 있고, 교육은 공식 평가 항목 중 가장 변두리에 존재한다. 실제로 최근 한국 의학교육 관련 논문과 의료계 기고문들을 보면, 교수 1인당 학생 수와 진료·연구 업무량에 비해 교육 준비에 쓸 수 있는 시간과 인센티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반복된다.[6][7]
이전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와 그에 따른 교육 인프라 부족은 문제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 향후 몇 년간 한꺼번에 늘어난 의대생들이 같은 기간에 실습에 몰리면, 교수 한 명이 감당해야 할 교육 부담은 커지지만 그 제도적 뒷받침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런 조건에서 교육이 '돌려 쓰는 시험문제'에 수렴하는 것은 충분히 예견 가능한 결과다.[7][8]
3. AI가 국가시험을 통과하는 시대,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
흥미로운 것은, 지금의 의사 국가시험이 정확히 AI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점이다. 최근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보건의료 분야 국가시험을 대상으로 GPT-4 성능을 평가한 연구에서, GPT-4의 평균 정답률은 70% 안팎으로 다수 시험의 합격 기준을 상회하는 수준으로 나타났다. 한국 의사국가시험 문제를 한국어 프롬프트만으로 풀었을 때도 합격선에 근접한 성적을 보였다는 연구가 나왔고, 다른 전공의 시험(마취통증의학, 피부과 등)에서도 영어 번역 버전 기준으로 합격선을 충분히 넘는 결과들이 보고되고 있다(실제로 체감했을 때 허무함이 어마어마했다).[1][4][9]
이 말은 곧, "한국 국가고시 성적"이 더 이상 인간의 차별화된 경쟁력이 아니라는 뜻이다. 문제은행에 맞춰 지식을 포장하는 능력은 LLM에게 아웃소싱되는 중이다. 인간 의사의 효용은 그 이상을 해내는지에 달려 있다. 환자마다 다른 맥락을 읽고, 모호한 정보를 가지고도 합리적인 위험·편익 판단을 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가치를 조율해 결정을 내리는 일들 말이다. 이런 영역은 최소한 지금의 AI가 가장 취약한 부분이며, 동시에 의학이 본질적으로 인문학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4]
4. 6년을 외우는데 허비하지 마라
그렇다면 오늘 의대에 입학하는 학생이 6년을 어디에 써야 할까. 한국 의학교육 관련 논의에서는 이미 "지식 전달 중심에서 역량 기반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오래전부터 나왔지만, 현실의 강의실과 실습현장에 녹아든 변화는 제한적이다.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여전히 두꺼운 교과서와 요약집을 가능한 한 많이, 빠르게, 오차 없이 머리에 집어넣는 능력이다.[6][7]
하지만 AI가 교과서 내용을 정제하고, 국가시험 해설집을 대신하며, 임상 가이드라인을 실시간으로 불러오는 상황에서, 학생이 6년 동안 똑같은 경쟁을 벌이는 것은 효율적인 전략이 아니다. 차라리 그 시간의 상당 부분을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쓰는 편이 훨씬 합리적일 것이다.[4]
인문학, 사회과학, 법·윤리, 기술·정책 등 '의학 바깥'의 언어를 익혀 의료를 둘러싼 세계를 넓게 보는 힘을 기르기
의료현장의 다양한 경험(일반 병동, 응급실, 지역의원, 요양시설, 정신과, 호스피스 등)을 통해 사람이 질환 앞에서 어떻게 변하는지 체감하기
팀 안에서 의견이 갈릴 때 설득하고, 듣고, 조율하는 연습을 반복해 '함께 결정하는 힘'을 키우기
이런 능력은 시험문제에서 정답으로 측정되기 어렵고, 단기간에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대신 한 사람의 의사가 평생 어떤 의사결정을 내리는가, 어떤 환자와 동료를 끌어모으는가, 어떤 언어로 사회와 소통하는가를 결정짓는 토대가 된다.
5. 획일화된 교육 속, 나만의 무기를 길러라
한국 의대 교육이 단기간에 하버드식 CBCL과 플립드 러닝으로 완전히 갈아엎어질 가능성은 낮다. 제도와 인프라, 문화가 한꺼번에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전략은, 주어진 제도에서 "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지식"을 익히되, 나머지 에너지를 나만의 역량에 투자하는 것이다(물론 이것만 하기에도 공부량은 방대하다).[6][7]
국가시험을 위한 지식 학습은 이제 AI와 협업하는 방향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요약집을 통째로 외우기보다, 필요한 순간 적절한 질문을 던져 답을 끌어내고, 그 답을 실제 환자와 상황에 맞게 비틀어쓰는 연습을 하는 편이 낫다. 그 대신 남는 시간과 정신적 여유를 인문학적 소양과 다양한 사회 경험, 그리고 자기만의 강점을 발견하는 데 쓰는 것이 앞으로의 의사에게 더 큰 성공을 안겨 줄 것이다.[4][6]
한국 의학교육은 지금, 구조적 위기와 기술적 전환이 몰아치는 큰 파도 위에 서 있다. 이 파도 위에서 살아남는 의사는, 가장 많은 것을 외운 사람이 아니라, "무엇을 AI에게 맡기고, 무엇을 인간으로서 끝까지 쥐고 갈지"를 가장 명확하게 구분해낼 수 있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한다.[4][6][7]
참고자료
[1] Performance of ChatGPT-3.5 and GPT-4 in national licensing examinations for medicine, pharmacy, dentistry and nursing https://scholarworks.bwise.kr/cau/bitstream/2019.sw.cau/84884/1/Performance%20of%20ChatGPT-3.5%20and%20GPT-4%20in%20national%20licensing%20examinations%20for%20medicine%20pharmacy%20dentistry%20and%20nursing%20a%20systematic%20review%20and%20meta-analysis.pdf
[2] Harvard Magazine - Rethinking the Medical Curriculum https://www.harvardmagazine.com/2015/08/rethinking-the-medical-curriculum
[3] Lecturio - Implementing a Flipped Classroom in Medical Education https://www.lecturio.com/inst/pulse/implementing-a-flipped-classroom-in-medical-education/
[4] PMC - GPT-4 Performance in Healthcare Licensing Exams https://pmc.ncbi.nlm.nih.gov/articles/PMC10908230/
[5] LinkedIn - Harvard Medical School Rethinks 4-Year Curriculum https://www.linkedin.com/pulse/harvard-medical-school-hms-rethinks-4-year-curriculum-ulrik-bak-kirk
[6] Korean Medical Education Review https://www.kmer.or.kr/m/journal/view.php?number=1004
[7] PMC - Medical Education Research https://pmc.ncbi.nlm.nih.gov/articles/PMC12202374/
[8] Korea Times - Student Quota Dispute https://www.koreatimes.co.kr/southkorea/society/20250226/student-quota-dispute-throws-korean-med-schools-into-uncertainty-ahead-of-new-semester
[9] JMIR Medical Education - GPT Performance in Medical Licensing Exams https://mededu.jmir.org/2024/1/e56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