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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nie et Travis May 02. 2023

핵심경험

1교시

  그게 어땠는지, 지하의 들쥐는 작은 정신을 모아 내부 어느 곳의 핵에 던져 넣고 어금니를 떨면서, 웃으면서,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규명할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숱하게 마비되었던 순간들에 말이다. 마비는 지금에 와서야 아주 뜸하기는 하다. 텔레포스의 창은 어느덧 끝이 무디어졌으니, 창창히 헐떡거리는 논박의 시대는 적어도 15년 가까이 지나가버린 듯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래된 이야기다. 그러나 돌아온 유행처럼 ‘지금의 나’라는 공간 속 여기저기에 널려있다. 들쥐가 왕국을 세웠던 풋풋한 지난 시간들을 끄집어내는 것이더라도, 일단 내 안에 있었던 것은 삶의 끝까지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의지로 냈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리 원하셨기에.

  삶에서 주요한 에너지원이 소진되었다기보다는 너무 오랫동안 방치한 바람에 소강상태에 놓였을 때, 모든 어설프고 탐욕적인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지금 나는 10대 후반부터 약 10여 년간 진행되었던 ‘나의 투쟁’에 대해서 회고하고 있는 것이다.

  “요리 잘하면 작품 하나 나오겠네! 들쥐의 작품이!”

  오래전, 마비를 상대하는 중에, 마비의 다음 단계에 임박했을 때, 이 말은 슬로건과 같았으니, 찰나더라도 개인적인 시공간은 필요했고, 그 사이 주린 정신을 반영한 몸은 떨면서 희열의 압력을 낮춘다.

  마비라는 어휘가 정확할까? 어쩌면 그보다는 강력한 부조리성이라는 직관으로, 그렇다면 무엇이 어떻게 부조리한가에 대한 앎의 욕구로, 끓어오르는 정신 상태를 거쳐, 대상에 대한 감사함까지 이어진다. 부조리를 통해 그럴싸한 자기 인식의 공식을 만드는 사람에게 이토록 유혹적인 속삼임은, 모든 폭발적인 솜씨가 그러하듯이, 자선처럼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거늘. 어디 감사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그러나 설명 불가능한 완벽한 상태의 단초가 되는 충격을, 나는 모종의 마비 상태라고 서술하기로 한다. 완벽한 상태가 벌써 눈에 선한데, 그럼 이제, 충격으로 머리를 맞고, 골이 울리고, 자 다음, 그럼 이제.

  침착해야 해. 구조화해야 해. 믿을 것은 규명뿐이야.

  더 명확하게 해야 할 것이, 반발적인 느낌조차도 스스로에게 설명되는 방식이 더 중요하다. 그 반발성을 어떻게 극복하거나, 저감할 수 있을지를 더 먼저 생각하겠지만, 그 고심 중에 발견하는 생각 머리에 발을 올리는 것은, 범죄 같은 은닉이, 오직 공개만으로 그 사전적 의미를 완성하는 ‘은닉’이 될 것이다.

  아무도 모를 수 있는 나를 나만 아는 것. 남이사 이 몸을 무엇으로 알아보시든, 가장 흔하게는 젊은 여자일 테고, 조금 나아가봤자 골칫덩어리요, 세상 바쁘신 나머지에게는 거의 보이지도 않으시겠지. 프루스트의 시간에 대한 베케트식 표현대로 말해보자면, ‘저주와 구원의 쌍두마차’인 유일무이한 들쥐가 되는 것, 이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

  자, 그렇다면 나는 나 자신이 들쥐인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나를 향해 이를 박박 가는 청중을 위해 어떤 자극을 던져야 하는가? 내 기억에, 나는 뭔가를 굳이 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알아서 놀라워했으니, 나는 무기를 고를 수 있는 무기고나 특별히 고안된 전술이 별개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멋에 취해 뽐내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떨어지는 과분한 관심은 혐오, 욕설, 기피, 희박한 경우에는 호기심이나 감탄 등등의 형태로 꽃을 피우고, 이것은 아주 정상적인 데다 생산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그러하니 그 어떤 통증도 내게 상처였던 것이 아니고 그 어떤 타인도 소극적으로 뒹굴거리던 게으른 성향의 사람에게 자존을 떠먹이는 귀인이 되셨으니, 타인의 투쟁을 유도하기를 책임지는 일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그리하여 나의 통증은 한결같이 ‘투쟁하는 개성‘을 구축시키기 위한 감사한 기회들로 환원되었다. 고통스러움이나 고립감과 같은 감득에 둔해졌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고, 그 안에서 도파민의 알고리즘에 복속되었다는 말이다. 그 공식이 견지하는 바는 역시나 나르시시즘에 빠져든 행위자 또는 반응자로 하여금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는 기쁨 그 자체이자, 그리하여 개성이 누려질 수 있는 실증이 되기 때문에, 들쥐라는 한때의 테마를 충족시킬수록 더 깊은 답을 내고 싶은 욕구를 가지는 순환성을 띄는 것이다. 나는 달라야 하고, 보편성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본능적인 욕구를 기반으로.(비공황인으로서 인지 교육을 받는다는 것도 이러한 인지습관에 따른 판단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들쥐는 통증을 원하고, 애호하고, 통증의 감내를 넘어서 그것을 조바심으로 기다리게 되었다. 다만 통증을 느끼면 쾌감이 동반된다고 해서, 마치 기행을 선보이는 고행자들처럼 박수갈채와 존경을 받았던 것은 물론 아니다. 나는 그저 부조리에 속하는 것이 좋았고, 그것을 견디는 게 좋았을 따름이다. 오해당하는 것도 좋아했다. 내가 나에게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숨겨져 있었으니, 그것도 황송하게도 대단히 알기 쉬운 방식으로, 나에 대한 오해가 없으면 기회도 없었고, 그게 좀 그랬다. 평화 속에서 갑자기 개성이랍시고 나대며 상대를 괴롭힐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언급했듯, 유일무이한 들쥐는 내적으로 게으른 것이 상당한 문제인지라, 그것은 무기력과 같이 수축된 심리 상태라기보다는 스스로의 나이브함에 굴복당한 나머지 만물과 우주와 양자이론과 운명과 기타 등등의 각종 자비로, 투쟁의 기회가 영원히 주어질 것이라고 믿어버린 백치의 믿음에 가까웠다.

  때때로 게을러졌다 싶으면 노숙을 한다거나, 낯선 이국의 땅으로 무작정 떠나거나 하는 식으로 파격적인 생활과 활동을 시작함으로써 통증을 유도하기도 했다. 게으름의 수준과 통증에 대한 열망은 비례했기에.

  10년인지 15년인지가 지났고, 그간 대강 평온했고, 그러나 고무적인 충격의 마비가 아닌 장기적인 능력의 마비로부터 들쥐의 불만은 깡통 속에 갇힌 부패한 공기처럼 팽창해 갔다. 활동 반경이 보잘것없는 자에 관하여, 그 범위가 점점 축소되는 동안 아무도 들쥐를 보지 못했고, 심지어는 그 자신조차 제대로 보지 않았고, 길고 지루한 무탈함의 연쇄 속에서 늙어갔다. 그 사이에 감사하는 마음도 퇴색되었다.

  들쥐는 궁극의 존재를, 자신의 창조주를 알게 되었고, 들쥐였던 이유를 조금 알게 되었고, 본질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투쟁의 징표로 낙인처럼 주어진 나르시시즘은 입시시모서티의 영웅 놀이가 아니었던바, 하나님께 나의 개성이 영광되는 것이 구원이었던바.

  개성을 과시하는 일은 어쩌면 손쉬운 인과성일 뿐이었으니, 아니면 적어도 행운에 가깝든지, 그렇다면 한 특이성에게 가능한 헌신과 기여는 무엇이었을까? 특이하되 본질을 담을 것. 특이하다는 것은 선도적이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천한 인간으로서 뭘 그렇게 안다고 인격 전반에서 앞서나갈 수 있겠는가? 이 또한 성령의 역사임에 틀림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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