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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직 익숙한 낯섦이라는 한갓진 측면에 머물러 있었다. 벽돌 건물 앞으로 작은 교량이 비교적 높게 서 있었다. 이 물줄기는 기껏해야 어부들의 덴마선 정도의 폭과 유사했고, 가로지르는 길이에 그 자신의 높이가 지지 않을 정도로 늘씬한 이것을 그 윗공간에 올려 세워 놓았다. 교통 법규의 권위 중에서는 그 쓰임새가 가장 낙천적인 육교와 대조해 봐도 하찮은 쓰임새이다. 이런 구조는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나는 선험적으로 정확히 이 기묘함을 폭넓게 정복한 바 있음을 인정한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어떤 기묘함이든 상관없을 때 어떤 기묘함이든 너무 잘 이해되는 현상, 그것뿐이다. 그냥 오, 하고 나지막하게 외치면 되는 것이다. 잡념을 더 곁들여봐야 소용없다. 진정 어린 탄식은 뭐랄까, 내 경험상, 대체로 굳어버린 혀와 몰이해로 대변된다.
교량의 끄트머리 사선 방향으로 팥알 같은 벽돌들이 일렬로 박혀 초콜릿 상자처럼 단순한 표상으로 살아간다. 초콜릿은 흔해 빠졌기에 보통 나의 이목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앞서 편안히 이해된 기묘함 탓에 결국 그 기묘함이 덕지덕지 붙은 구조를 비평하게 만든다. 6층 연립주택이 비상하리만치 교량에 근접해 있어서 마치 건물의 3층쯤에서 교량을 비스듬하게 출발시킨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렇다면 다리 방향으로 창문이 난 저 상자의 주민들은 코앞에서 다리를 건너는 행인들을 받아들이고 있단 말인가? 마당이 없는 단층 주택의 주민들의 창 밖은 지상에 붙어 난 보도블록, 차도와 차량, 조경 사업의 이모저모 등등, 수용된 개념들을 올려놓는 수완을 부릴 것이다. 그렇지만 최소 2층 이상의 창 밖으로 죄다 허공인 가운데 통행인을 몇 명씩 실어 나르는 땅바닥의 엉뚱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아무리 친숙한 기묘함이라도 상상은 그냥 웃어넘길 가능성을 제거해 버린다. 물론 대강 몰라보기보다는 조금 더 희한한 주목이 성사됐다고 해서 여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쇼크를 평화롭게 즐길 수 있는 기회이다. 나는 아마 근래 들어 이런 기회에 어지간히 길들여진 듯하다.
종종 쉬운 일들은 갑자기 지나가버린다. 타고난 우정이란 일종의 요행처럼 능동적인 결과로 기억되지 못하는 것이다. 낮은 가택들은 원경이 되어 벌거벗은 사잇공간으로부터 자연스러운 희생을 요구받는다. 멀어져 버렸을 때 이제 그들은 초콜릿 상자뿐 아니라 거의 어떤 표상도 되기 힘들다. 어쩌면 표상의 인식을 하나 또는 찰나 살펴볼 수도 있었지만, 마땅히 그만두는 것은 실존의 자연스러운 증거이다. 우리가 걸음을 멈춘 적이 없음에 따라 하나의 재현은 다음 재현을 위해서라도 죽어야만 한다, 내 손끝에 닿은 작은 표적表迹만을 남긴 채.
벌거벗은 공간은 된통 낯설다.
도시 속인가, 밖인가?
집들이 막막하게 보이는 들녘을 지배하는 험한 강이라. 오, 한강이나 블타바 강, 센강에 결박된 도시 공간이 눈앞에서 얼마나 가득히 차오르곤 했는지 그런 공간과는 견줄 것도 없다. 도시를 낳은 어머니 강이야말로 전형적인 재현의 대상이며, 그것은 나 같은 도시인에게 지속적으로 쉬운 일로 보인다, 방금 헤어진 그 물줄기만큼이나. 배경도 아니며 요소도 아닌, 거대하지도 좁지도 않은, 저 몹시 서두르는 낯선 강을 보라. 경험한 적은 있지만 재현인 것은 아니다. 재현이 끝나버렸다면, 그런데 그것이 다른 재현을 위해서도 아니라면,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 재현이 아닌 기억이란 무엇일까?
하여간 그 기억 속에서도 너는 역시나 내 곁에 있었다.
기억은 공유되어 남아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