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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년기는 되려 집을 떠난 18세 7월부터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2004년에, 정신은 나에게 쥐덫에서 이죽대며 썩어 가는 여우 발 하나를 남겼다. 그리고 한껏 시간이 흘러 어느 일요일이다. 해가 한 번 더 기울면, 주택가를 따라 흐르는 라벤더 빛 하천 옆에서 매우 안심하고 있는 사람이 재현된다. 그러데 재현되었다면 그것은 먼저 풍경인가, 아니면 풍경이 이용된 방식인가?
안심했을 때, 혹은 모르긴 몰라도 안심하려고, 나는 이런 느낌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옆에는 늘 네가 있었다.
이것은 이미 공유된 것이나 다름없는 느낌이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다만 너의 이미지와 나의 이미지가 맺고 있는 관계를 내포한다. 이미지는 형상에 집착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너의 집착과 나의 집착이 긴밀하고도 효율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너와 동일한 태생을 이미지를 통해 누리면서도 어느덧 조금씩 어긋난 채 여기까지 온 우리의 괴리가 아주 익살스럽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근거 있는 게으름은 신나게 누적되었다. 너와 나는 각자 느낌을 표현하고자 노력할 때 자연적으로 연합된 이미지를 추적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비전이라기보다는 행동의 표명에 따라 실시간적으로 드러나는 진실 그 자체이다. 그리하여 근거 있는 게으름은 각자 익숙한 총체에 작은 흥분을 불어넣기 위함이다.
그렇다.
안심했을 때, 혹은 모르긴 몰라도 안심하려고, 나는 네가 함께 존재했던 장소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 이야기되지 않은 우리로서 돌아가려고 한다. 우리라는 그늘로 들어가서, 그 음영을 온몸에 드리우고, 그러한 그늘빛으로 있는 것을 자신의 할 일이라 생각한다. ‘상태적 외양’을 ‘중재적 수행’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중재라고 조금 잘못 말한 것 같다. 그보다는 우리라는 두 요소가 불러들인 세상이 단 하나의 장소임을 확인하는 기쁨이지 않고서야 이야기를 시작할 요량이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나는 여러 좁은 물줄기들을 최근에 자주 기억하는 듯하다. 동네의 하천이나, 소박한 산세의 계곡 등등. 정겹기만 하고 그 이상의 동요를 주지 않는 물길에는 잡을 데가 많아서, 숱한 재현 뒤의 또 몇 번의 재현이 겹쳐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의 일인지 혼동되게 만든다. 아늑하고, 가깝고, 스스로 거울을 보고 느낄 법한 생명이 있고, 많이 어두워지더라도 낯설어지지 않는다. 태양으로 인해 데워진 표면 곳곳이 시력이 좋지 않아 끔뻑이는 눈 안에서라도 죄다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새로운 것을 포착하는 일은 여유롭다. 눈은 흥밋거리를 느슨하게 기어올라 갈 수 있다. 발걸음을 서둘러야 하는 물리적 환경조차 시급히 노출되려고 하는 신박한 정보와 의외로 대비되지 않는다. 색다르지만 충분히 효과적인 만남,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으면서 안심과 짝지어진 무지無知라니. 내가 시간이 없다며 거만하게 무시해 버린다손 치더라도 끝끝내 이 손끝에 닿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