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고작 계절

by 정세훈

#1

허공에 대고 휘적이던 마음들은 어째서 그 무엇과도 섞이지 않는 걸까.

같은 시간을 보내어도 나의 시간은 일그러진 모양으로 흐르는데, 너는 그렇지 않았던 걸까.

철수와 영희가 부러웠다.

단 하루 만이라도 좋으니, 우리만의 세계를 만들어 너와 나를 엮어두고 싶었다.

스무 살 - 건드리면 터질 것만 같던, 한껏 부풀어 오른 싱그러움으로 온 몸이 뒤덮여있던 그때처럼 어리숙함을 핑계삼아 그 무엇하나 넘어갈 수 없었다.

지독하게 가볍고 짧았던 시절의 시간에 무게 추 몇 방울만 더 달았을 뿐인데 시간은 너무 쉽게 깊어졌다.

가벼움은 무게가 되고, 순간은 기억이 되었다.

‘우리’라는 말은 끝내 허락되지 않았다.

‘나와 너’, ‘너와 나’의 작은 획으로부터 생기고 사라지던 무게추들은 심해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움직임이 마치 삶의 리듬 같았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 그저 존재하는 시간의 무게가 있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서로를 스치고, 스친 자리는 잠시 빛나다가 사라졌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때의 모든 것은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경계, 묘하게도 가장 많은 이야기가 피어오르던 곳.


시간이 흘러도 잔상은 남는다.

그 잔상들은 이름도 감정도 없이, 다만 조용히 넘실거린다.

때로는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다.


#2

끈적하고도 질척거리는 너에게, 나는 무엇 하나 남겨둘 수 없었다.

미처 씻어내지 못한 것들은 잔가시처럼 남아, 언젠가 나를 미치도록 간지럽힐 테니까.

내게는 3초도 걸리지 않는 문제들에 너는 3개월을 밤낮으로 매달렸지만, 끝내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


나의 자랑들은 너의 고민과 아픔보다 더 중요하여 더 이상 너라는 책의 다음 페이지가 궁금하지 않았어


‘다음에 읽어야지’ 다짐하며 꽂아두었던 책갈피를 조용히 빼내어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춘다.

마지막으로 읽었던 페이지가 어디였는지,

그 냄새가 어땠는지,

무슨 내용이었는지,

누가 등장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주인공이 우리였던가, 아니면 나 혼자였던가.

기억의 문장들이 하나둘 흩어지고 나면 책은 닫히고, 남는 건 단지 손끝에 묻은 종이의 감촉뿐.

그 질감마저 잊어버릴 때까지 책을 펼치지 않으리라, 급류에 휘말리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나는 잊지 않기로 하며-


#3

사랑아, 보고 싶다.

그냥 그런 날 있잖아. 문득 더 생각나는 날.

어제 저녁, 샴푸 거품을 헹구다 문득 네 생각이 났어.

하얗게 부서지는 거품이 네 털 같아서,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서 멍때렸다?


맞다, 오빠 오늘은 좀 이상한 짓을 했어.

사랑이 무지개다리 건너기 전에 복부에 암덩어리가 가득 차서 많이 부풀어 있었잖아.

그게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서, 밥 먹자마자 미친 듯이 뛰었어.

숨이 턱턱 막히고, 가슴이 터질 듯 뛰었지.

잠깐은 내 배가 부풀어 오르는 착각이 들더라.

한심했지. 그래도 미안해. 그냥 너무 그리워서.

지금도 고개만 돌리면 두 손안에 네가 보드랍게 감겨질 것만 같은데,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하염없이 초침 감기에 바쁘더라.

아직도 네가 쓰던 베개를 치우지 못했어, 사랑아.

이제 곧 2년이 다 되어가는데 말이야.


잠에서 깨어 방문을 열면 너는 또 아무렇지 않게 문지방에 앉아 꼬리를 흔들며 나를 맞아줄 것 같아.

그래서 나는 매일같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문을 연다.

참 바보 같지, 그렇지?

아, 사랑아.

너만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나.

왜 하필 눈물까지 흰색일까.

세상에는 하얀 것들이 너무 많아 너를 잊지 않아도 되는 게 다행이지만, 그 흰색 사이로 스며든 공백을 바라보면 오히려 더 가슴이 시리다.

아직도 네 이름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너를 사랑하고 있어.

사랑의 주체로서 너를 대하겠다는 그 다짐은 여전히 그대로야.

보고 싶다, 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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