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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 한순간에 자신이 없어졌다

by 이하늘

손은 한순간에 자신이 없어졌다.

모든 것에.


잠에 드는 것부터 눈을 뜨는 것까지, 그러니까

정말 그 모든 것에.


냉장고를 열 수 없어 수저를 놓지 못했고,

치약을 짤 수 없어 씻지 못했다.

말할 수 없어 아무도 만나지 못했고,

들을 수 없어 무엇도 듣지 못했다.

보지도 않는 것은 당연하여

그저 납작한 벌레처럼 누워있었다.

정말 그것 말곤 할 수 있는 것이 도무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없는 거야, 힘이 없는 거야.


자신이 없어 힘도 없었다.


손은 분명 며칠 전만 해도 괜찮았다.

재미난 것을 보며 웃기도 웃고

골똘히 무언가에 집중해 해내기도 했다.

떡볶이가 먹고 싶어 가스불을 켜기도 했으며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한순간에.


태어나길 잘했다는 순간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걷잡을 수 없었다.


탄생은 내 뜻이 아니었으니

염세는 진리가 되었다.


태어났으니 사는 것이다.

손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랬다.

인간만이 탄생에 의미를 부여하여

모든 생의 축복을 말하지만

인위로 점철된 요람일뿐, 요람은 공평하지도 못했다.


어쩌라는 걸까.

믿지도 않는 신에게 손은 툭 내뱉어 보았다.


없는 것을 찾느라 한없이 무력해지는 거라면,

그렇다면.


신을 찾는 것 역시 도움 되는 행위는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손은 널브러진 자신의 몸뚱이의 뻐근한 감각

잊어보려 했다.


수많은 죽음과 탄생이 만들어낸 아득한 시간을 발판 삼아

두 발로 걷고 손을 쓰며 생각하

지금의 인간의 형태가 되었으나

손은 자신이 진화의 도태에 속하는 종이 아닐까 싶은

먹먹한 마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화는 과거, 현재, 미래에서도,

지구가 멸망하기 전까지도 진행되는 유기체들의 아주 긴 과정이기에.

그 긴 시간 동안 수없이 자연적으로, 인위적으로 선택되고

즉 도태되며 살아남기에 적합한 돌연변이들만이 이 지구를 채워나가고 있는데.

손은 살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래의 인간에겐 손이 가진 부정과 무력, 나약의 성질은 남아있지 않을 것 같았다.


차라리 신이 있는 게 나았다.

그는 공평하게 창조물을 사랑하고 뜻이 있다 하시니

그렇다면 손 역시도 사랑스러운 인간들 중 하나일 수

있었을 텐데.


믿어볼까

하다가 손은 관둔다.


신보다 자신의 도태가 더 믿을만한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태어났으니 사는 것이다.'


무책임하고 무정한 도출이었다.


살기 위해 태어났다면

조금은 달랐을 거라고, 아니 아주 많이 달랐을 거라고.


손은 손가락을 까딱, 움직여보다가

더는 자신이 없어 눈만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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