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안전지대 끝에서 시작된다.

단순한 안내글이 아닙니다

by 오행시

출근과 동시에 사내 전산망에 접속한다. 일반인에서 공무원으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역시 메일이 하나 도착해 있다. 60세 이상 백신 부스터 샷 예약접수는 물론 예방접종센터 이송까지 부담할지도 모른다는 안내였다. 글은 안내라는 형식을 빌어 짧고 간결했지만 내용은 사실상 협박에 가까웠다.


올해 초 75세 이상 어르신 백신 접종으로 그 난리를 피우기 시작하더니 명절 즈음 '상생 국민 지원금' 지급으로 연속된 근무 압박을 받으며 7개월을 채우는 참이었다. 이제 조금 숨 좀 쉬려나 했더니 다시 백신 접종에 동 직원들이 동원될 조짐이다.


공무원 경력 31년 차에 역대급 사태를 맞이했다. 코로나19는 모든 이들의 삶의 방식을 바꿔놓았다. 그중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고 있는 행정복지센터 근무자들, 행정의 최일선에 있는 지방공무원이 아닐까 싶다. K-방역이나 한국의 코로나 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정은 고사하고 나는 솔직히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지방공무원에 대한 노고를 한마디라도 언급해주길 바란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이를 적용하는 최하위 조직이 없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한 매체 좌담회에서 박건희 경기도 감염병관리지원단장은 "지자체 공무원들은 '갈아 넣어지고'있을 정도로 큰 정부 역할을 했다. 지역 공무원들의 노력이 없었으면 누리기 어려웠다고 본다."라고 밝혔다. 내가 꼭 듣고 싶은 말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K-방역과 백신 접종, 자가 격리자 관리, 동 직원들은 코로나19가 빚어놓은 정책 실천 현장에서 국민 욕받이가 되어가며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중이다.


그나마 관리자라고 실무와 거리두기를 하고 있지만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우리 같은 지방공무원들이 얼마나 힘겹게 버텨가는지, 우리가 소모하는 감정에너지의 온도를 전해주는 일, 그 일이 내가 해야할 일이다. 물론 아주 가끔은 가슴 언저리가 따뜻해지는 때가 있다.


모든 의욕이 바닥에 쫙 깔릴 때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 또는 사람 아닌 것들을 통해 위로를 받는다.


그런 걸 우리는 '보람'이라고 부르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