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하고 싶은 자유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by 오행시

겨울 저 편으로 저녁노을이 곱다. 하루의 일상이 저렇게 곱고 따스하게 흘러갈 수 있다면 참 괜찮겠다. <자유론>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내다본 밖의 풍경이다. 유난히 짧은 낮시간이 사라지면서 긴 밤을 준비하는 중이다.


왜 진작에 이 책을 읽지 않았을까? 브런치에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 소회를 올리면서 마지막 문장에 <자유론>에 대한 호기심을 살짝 들여 놓았다. 사실 읽어야겠다고 했지만 진짜 독서로 이어지기까지 수월찮은 시간이 필요한 편이다.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 글을 읽은 친절한 분이 <자유론>을 강추한다는 댓글을 달아주셨고 나는 보답을 해야 했다.


워낙 인문학 분야에 잘 알려진 책이고 저자였기 때문에 겉핥기로 몇 가지 정보가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겁이 났던 거다. 대체로 ‘○○론’류의 책들은 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에, 읽어도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배배 꼬인 문장들로 꽉 차 있었다. 정말 컨디션이 좋은 날 읽어야지 했던 거다. 막상 책을 받아놓고 보니 250페이지가 조금 넘는 두께였다. 요약본인가 싶어 다른 출판사 것도 찾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얼마나 편견에 사로잡혀 사는지.


존 스튜어트 밀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영재교육을 받은 인재였다. 하지만 그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정말로 훌륭해질 수 있었던 것은 부인 헤리엇 테일러 때문이다. 밀이 24세 때 만난 테일러는 23세였지만 이미 결혼해서 두 아이가 있는 유부녀였다. 그럼에도 20년 이상 사랑했고 그녀와의 결혼생활은 고작 7년밖에 되지 않았다.


뛰어난 음악가에게 뮤즈가 있듯이 훌륭한 학자에게도 영감을 주는 조력자가 있다. 밀의 대부분 저서는 부인 헤리엇의 조언이 들어있다고 한다. 이 책도 그녀와 함께 썼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에 수정은 하지 못했다고 했다. 책의 첫머리에 부인에 대한 찬사와 원고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을 고스란히 밝히고 있다. 그가 정말로 뛰어날 수밖에 없는 것은 정직함과 당시 여성의 능력을 폄하하던 사회였음에도 부인의 생각과 사상을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아는 겸손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본다.


다섯 개의 장마다 주제가 있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자유에 대한 진정한 의미’라고 볼 수 있다. 핵심 내용은 1장 머리말에 대부분 수록되어 있고 내가 가장 많이 흥미를 느낀 부분은 5장 현실 적용 부분이다. 아무래도 공무원이라는 직업 특징 때문에 정부의 역할 부분이 관심을 끌었다. 몇 가지 인상에 남는 부분을 옮겨본다.


첫 번째, 밀이 생각하는 ‘진정한 자유’에 대한 정의다.

자유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하고 또 유일하게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는 자유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내용이다. 생소하지도 않고 너무나 자명한 원론, 이미 200년 전에 이렇게 명쾌하게 '자유'를 정의했지만 우리는 그런 자유를 누리고 사는 것 같지 않다.

글처럼 잘 안되기 때문이다. 이미 사회에서 정해 놓은 자유로워 보이는 삶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애써야 하는지. 무엇보다도 내가 원하는 자유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자유롭다고 느끼며 살 수 있겠는가?


밀의 주장대로 사회는 인간의 개별성을 인정하고 개인이 추구하는 이상에 도달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러하지 못하다. 사회가 정답처럼 설정한 성공이라는 기준에 맞춰 아등바등 살도록 종용받고 있다. 사회가 만든 것으로 우리와는 무관하지만 학습된 경험에 의해 무의식 중에 '성공=사회가 정한 기준 부합'이라는 명제에 빠져들고 있지 않은지.


물론 개인이 자유를 통해 경험하게 되는 인과관계는 오롯이 본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일침을 박는다.

우리의 육체나 정신, 영혼의 건강을 보위하는 최고의 적임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각 개인 자신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자기 식대로 인생을 살아가다 일이 잘못돼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런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게 되면 다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길로 억지로 끌려가는 것보다 궁극적으로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인간은 바로 그런 존재이다.

제9회 브런치 수상작이 발표되었다. 당연히 안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람 욕심이라는 게 한도 끝도 없다 보니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내 방식대로 글을 썼다. 자신은 없었지만 기대했고 실망했다. 그래도 또 쓴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실망할 자유가 있다. 밀의 말대로 일이 잘못돼 고통을 당하더라도 내가 선택한 길이기 때문이다. 힘들지만 글을 쓰고 지우고 생각하는 여정에서 얻어지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배움이 있다. 수상작들은 하나같이 훌륭했다. 부러움을 넘어 한 번 더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실패하더라도 도전하는 것이 나의 자유임이 틀림없다. (왠지 씁쓸하다.)


두 번째,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에 동의한다. 밀은 인간 지성의 본질에 비추어볼 때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지혜를 얻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틀린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는 일을 습관화하는 것이 우리의 판단에 대한 믿음을 튼튼하게 해준다고 했다.

인간이 내리는 판단의 힘과 가치는 그 판단이 잘못되었을 때 고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중략)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의 비판에 늘 귀를 기울이는 데서 비롯된다. 자신에 대한 반대 의견까지 폭넓게 수용함으로써 그리고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어떤 의견이 왜 잘못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줌으로써, 옳은 의견 못지않게 그릇된 의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 보고, 나아가 다양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그 문제를 이모저모 따져보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한다. 현명한 사람 치고 이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지혜를 얻은 사람은 없다.

브런치 수상작 선정이 안되어 실망하고 있는데 전화기가 울렸다.(뒤끝 작렬) 실무자가 통화 중이면 같은 라인의 관리자 쪽으로 전화가 넘어오게 되어 있다. 예전에 담당했던 업무였지만 실무에서 손을 놓으면 간단한 업무도 잊어버리게 된다. 더구나 이 분의 상황이 까다로워 쉽게 해결되기는 어려워 보였다. 섣불리 이야기하면 안 될 것 같아 부정적인 뉘앙스로 밑자리를 깔았다.


아니나 다를까 대뜸, 법과 정부를 욕하기 시작했다. 내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부터 공무원에 대한 비리까지 본인이 요구하는 민원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순간 불끈하고 쓸데없는 얘기할 거면 끊으라고 하고 싶지만 가만히 듣는다. 아, 이분은 요구사항이 해결 안 되니 화가 난 상태이구나. 거의 100퍼센트, 이런 상태가 되면 혼자서 분풀이를 한 다음 일방적으로 끊기 일쑤다.


끊긴 전화에 나도 모르게 후유 소리가 나왔다. 혹시나 싶어 실무자를 불러 민원의 사정을 전했다. 실무자는 어렵지만 해결방안이 있다고 했다. 언제 바뀌었대? 자고 나면 바뀌는 법과 지침인 줄은 알지만 수요자를 위한 행정서비스는 한계가 없나 싶다. 전화를 받은 책임 때문에 다시 연락을 취하고 방법을 알려줬다. 아까와는 사뭇 다르다. 이렇게 친절한 공무원이 있었느냐며 이제는 칭찬 일색이다.


내가 만약 내가 배웠던 예전의 방식대로만 고집하고 물어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마 며칠 후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항의 전화가 왔을지도 모른다.

이미 법과 제도는 다양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시작에서 문제를 따져보고 해결방법을 제시해 놓고 있었음에도 나는 무지했다. 어떤 일이든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결정하기보다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나 정보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배움에는 경험과 나이가 무색하다.


세 번째는 자유를 침해하지는 않지만 정부의 간섭을 반대한 이유이다. 아무래도 직업이 그렇다 보니 정부에 대한 부분은 관심이 깊을 수밖에 없다. 정치권의 구호 중 ‘작은 정부’는 단골손님처럼 등장한다. 30여 년을 근무했지만 작은 정부는커녕 몸집은 오히려 몇 배나 커졌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작은 정부’는 조직의 외형과 구성원수가 아니라 그 조직이 가지고 있는 권한의 축소를 의미한다. 이미 200년 전 존 스튜어트 밀이 정부에 대해 이련 견해를 가졌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정부의 간섭을 반대하는 이유 첫째, 정부가 하기보다 개인에게 맡겼을 때 더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사업을 할지 누가 어떻게 그 일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 문제에서 개인적으로 직접 이해관계를 가진 당사자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둘째, 사람들이 개인적이고 가족 중심의 편협한 이해타산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공동의 이익에 대해 알게 되고 공공 이익을 위해 해동하고 서로를 고립시키기보다 한데 묶을 수 있도록 자신의 행동을 습관적으로 이끌어가도록 학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이미 비대해진 정부의 권력을 더 이상 강화시켜서는 안 된다. 정부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활동적이고 야심만만한 시민들은 점점 정부 또는 집권을 꿈꾸는 정당의 눈치나 보는 존재로 전락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보던 업무 중에 '주민자치'가 있었다. 말 그대로 주민이 주인 되어 지역에 관한 일들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모델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름이 그러하니 주민단체에 대해 그저 뒤에서 서포트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왠 걸 하나부터 열까지 공무원의 손을 거쳐야만 일이 해결되는 구조였다.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있는데 그때 팀장이 하는 말,


"주민자치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업무에 들어 있는 거야. 그렇게 변화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우리 일이지"


그 얘기를 들은 지도 벌써 십여 년이 넘은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주민 잘못만은 아니다. 여태 허리띠 졸라매고 정부가 하라는 대로 열심히 따라왔고 덕분에 왠 만큼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다분히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제 당신네들 일이니까 당신들이 해결해.'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연습과 경험이 필요하다. 요즘 마을단위, 지역단위 자치,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업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당연히 지향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자유론>은 그동안 멀리했던 인문학의 궤도에 발을 놀려 놓게 해 줬다. 다음에 이어질 독서도 아마 연관된 내용으로 갈 것이다.


이토록 훌륭한 혜안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 끝으로 '자유' 이야기로 마무리를 한다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존 스튜어트 밀은 "오직 덕, 사려 깊음, 절제, 자기 통제의 덕목을 갖춘 사람만이 진정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자명한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즉 올바르게 선택하는 사람이 진실로 현명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전제가 되는 '올바르게 선택한다.'는 또 무엇일까? 선택의 기로에서 자기 독선에 빠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묻고 답을 찾아가는 노력, 그 과정에서 축적된 진액을 뽑아내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