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짱다리 남자

폴 블름의 <공감의 배신>

by 오행시

살짝 양 옆으로 휘어지기 시작한 살집 없는 남자의 두 다리가 눈에 띄지만 않았다면 그냥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서서 이야기할 때는 몰랐는데 급히 뛰어가는 뒷모습, 깡마른 상체를 받혀주는 두 다리가 힘없이 양 옆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달리는 폼은 앞을 향하지만 다리는 자꾸 옆으로 벌어진다. 노화의 증거겠지. 집까지 다녀오려면 40분은 족히 걸릴 텐데 그때까지 당도할 수 있을까? 이미 6시 15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3시쯤 직원이 가져다준 후라이드 치킨 세 조각을 거뜬히 해치우고 6시가 되자 사무실로 내려왔다. 당직자와 야근을 하는 두 세명 정도가 남아있었다. 요즘들은 5시 50분쯤부터 퇴근 준비를 해놓고 6시 땡과 동시에 퇴근을 하나보다. 남은 사람 중에 치킨의 주인공이 있었다. 이번 정기인사로 합류하게 된 직원이다. 인사발령이 나면 대부분 난이나 다육이 심어져 있는 화분을 받는다. 그러나 그런 식물화분은 몇 달 지나면 메마르고 처참하게 비틀어진 몰골로 사무실 밖으로 슬그머니 내쳐진다. 특별히 화분을 아끼는 누군가가 있지 않다면 공용공간에서 살뜰한 보살핌을 받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오늘처럼 먹을 것을 보내주는 축하인사는 받는 사람은 물론 주변 동료들에게도 더없는 즐거움이다. 코로나로 함께 모여 즐길 수는 없지만 종이컵에 두세 조각을 담아 각자 자기 책상으로 가져간다. 갓 튀겨온 치킨 조각이라니, 모여 먹어야 대수인가? 이렇게 혼자 먹어도 기막히게 맛있다. 7시에 운동이라 아주 때를 맞춘 간식이었노라며 인사를 건네는 중이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그 남자가 들어왔다. 흰머리가 눈에 띄어 순간 어르신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키가 컸다. 마스크에 가려 제대로 얼굴을 알 수 없지만 선한 눈매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한쪽 손에 천 원짜리 지폐를 든 채 다급하게 물었다. '가족관계 증명서'를 떼러 왔노라고. 6시 5분이었다. 6시까지 근무란 것을 알고 부리나케 뛰어왔지만 외부에 있는 무인발급기에서 시간을 몽땅 써버렸다고 했다. 지문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런 일은 흔하다. 겨울철에는 손이 건조해서 지문검색에 실패하는 일이 자주 있다. 직원이 물휴지를 가져와 함께 무인발급기로 갔다. 예닐곱 번을 시도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단순한 건조증이 아니었다.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하얀 반창고가 감겨있었다. 지문검색을 위해 오른쪽 엄지만 반창고를 떼 낸 자국이 있다. 관절염이나 뼈마디가 쑤셔서 붙인 게 아니었다. 손이 무척이나 거칠었다. 세상 풍파를 견디느라 거칠고 두꺼워진 피부는 건조함에 견디지 못하고 자작자작 결을 따라 갈라지고 있었다. 갈라짐의 깊이가 심해지면서 틈 사이로 평생 밖으로 나올 일 없는 붉은 속살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생경한 공기에 불만을 드러낸 속살들, 따가웠으리라. 주인장은 하얀 반창고를 칭칭 감는 걸로 원래 상태로의 회귀를 기대했건만. 손가락은 이미 변형된 지 오래였고 지문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상태였다.


예전에도 지문검색이 잘 안 되었다는 육십 대 초반의 남자, 그렇다면 일찌감치 사무실로 들어왔어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신분증 없이 달랑 돈 천 원만 들고 온 것이다. 급한 게 아니면 내일 오시라 했다. 이 저녁에 제출할 곳도 없으니 내일 신분증을 가지고 여유 있게 오면 좋지 않겠냐고 서너 번을 말했음에도 그의 눈은 허망했다. "집사람이, 집사람이"


오늘 발급해야 할 이유로 보기에 설득력이 없지만 말끝을 흐리는 그의 음성에서 그쪽 상황이 그려졌다. 그 집사람은 며칠 전부터 누누이 증명서를 발급해 놓으라고 했을 터. 남자는 잊어버렸거나 미루거나 해서 며칠을 훌쩍 보내고 나서, 오늘에서야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있는 아내를 보고 이것저것 겨를 없이 천 원만 치켜들고 뛰쳐나온 것이다.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었다. 다행히 발급 권한이 있는 직원이 남아 있었다.


문제는 신분증. 직원은 7시 안에만 도착하면 발급해 준다고 했다. 차도 없고 집에서부터 뛰어왔다는 남자는 아직 한겨울 추위에도 허름한 봄 잠바에 슬리퍼를 신고 있다. 남자가 두툼한 패딩점퍼만 입었더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나는 담당 직원을 따로 불렀다.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했다. 신분증은 없지만 거짓말하는 것 같지 않으니 떼어 주는 게 어떠냐고. 직원은 침착했지만 표정은 뜨악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장면이다. 기관장이 되어가지고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으니 말이다. 내 체면을 생각했는지 직원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선례가 되면 안돼서요." 한다.


'원칙을 지켜야 한다.' 수없이 말해놓고 이런 상황에 예외를 들먹이다니. 순간 아차 싶었다. 직원은 자신이 7시까지 대기하겠으니 그때까지 신분증을 가지고 오면 발급해 주겠노라고 했다. 그 말은 전해 들은 남자는 허망한 눈빛으로 허적이며 문을 나섰다. 그리고 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남자를 보내고 사무실에서 하릴없이 배회하다 6시 30분이 되어 밖으로 나왔다. 평소보다 시간 여유가 있다. 센터 프로그램 편성표를 확인해보니 '아로마세러피'가 8시로 옮겨져 있다. 7시는 자유운동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시간 뒤에 올걸. 센터를 나와 차에 시동을 거는데 괜스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뭐지?


집에 돌아와 베이징 올림픽 중계를 보는데 첫 금메달이 나왔다. 당연히 기쁘고 환호할 일인데 그저 그렇다. 눈은 TV에 고정되었지만 머릿속은 다리 사이 커다란 공을 끼운 것처럼 엉거주춤 뛰어가던 남자의 안짱다리만 떠올랐다. 도울 수 있었는데, 충분히 내 차로 한 번만 갔다 왔어도 되는 건데, 왜 그런 생각은 못하고 직원에게 무리한 요구만 하였는가? 후회였다.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못한 까닭은 또 무엇일까? 차도 있었고 시간도 충분했다. 그런데 왜 집까지 데려다 줄 생각을 못했을까? 어차피 조정 가능했던 일정, 차를 몰고 그가 사는 곳까지 갔다가 다시 오는데 얼마 걸리지도 않았을 텐데. 실상은 언제부턴가 스멀스멀 주변을 싸고 도는 안락의 유혹에 점점 빠지는 듯 하다.


민원발급의 제일 원칙이 신분증 확인인데 이를 무시하라는 한심한 지시나 생각해 내고 있었으니.


이 년 전쯤 읽은 폴 블름의 <공감의 배신>이 생각났다. 그때에도 공감은 무조건 좋은 것인데 왜 배신을 해야 하는지 궁금했었다. 열심히 읽은 기억은 났지만 내용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부랴부랴 프롤로그를 다시 읽고 페이지를 몇 장 넘겼다. 그의 결론은 '공감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경험하는 행위지만 우리가 일상 관계에서 서로에게 친절하게 대하려면 공감능력을 발휘하는 것보다 자제력과 사고력을 발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는 것이었다.


즉 작가는 인간에게는 직감이 있지만 그 직감을 무시하고 문제들을 충분히 숙고해서 깜짝 놀랄만한 결론을 이끌어낼 줄 아는 능력이 바로 진짜 행동이라고 했다. 그래서 '특정인에 대한 공감보다는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공감능력이 높은 사람은 타인의 고통에 지나치게 동화될 위험이 있고 타인의 고통에 지나치게 동화되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를 도울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를 들면 TV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어린아이의 앙상한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에 눈물은 흐르지만 얼른 다른 채널로 돌리고 잊어버린다. 그다음에는 아예 그 채널을 지나치게 된다. 안타까워하는 자신의 감정에 동화되어 불필요한 감정 낭비를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후원금을 얻기 위한 홍보영상임에도 자기감정에 치우쳐 후원이라는 수요에 무관심으로 대처하는 것과 같다.


공감능력이 높다고 선량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공감능력이 낮다고 악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다만 연민이나 염려처럼 상대방과 조금 더 거리를 두는 감정들이 선량함과 관계가 있을 수 있고, 연민 부족과 타인에 대한 관심 부족,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지 못하는 무능이 사악함과 더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새겨야 한다.


예전에 장애인 시설에 자원봉사를 하러 간 적이 있다. 중증장애인이라 대부분 침대에 누운 채 버둥거리는 아이들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가여운 마음에 열심히 일했지만 그날 이후 장애아동시설은 가지 않았다. 눈물만 한 바가지 쏟고 나오면서 이미 지나치게 감정을 소모해버린 것이다. 결국 봉사활동이라는 실질적인 도움으로 연결이 되지 못하고 회피만 일삼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공감의 유일한 결과가 간접적인 고통이라면 공감은 타인을 돕게 하는 힘으로서는 별로 쓸모가 없다는 얘기다.


블룸은 앞날을 계획할 때는 공감이라는 직감에 의존하는 것보다 도덕상의 의무와 예상 결과에 대한 이성적이고 반 공감적인 분석을 따르는 것이 낫다고 한다. 또한 소수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우리의 감정이 다수에게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퇴근 무렵, 직원에게 신분증은 없으나 형편을 살펴 편의를 봐주도록 했다면 그건 바로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는 후자에 속할 수도 있다. 물론 너무 따지고 들면 융통성 없는 행정이 되어버린다. 늘 고민하는 것 중에 하나가 '어디까지 개입하는가?'이다. 수없이 쏟아지는 개개인의 요구사항, 지금 생각해보니 공감도 필요하지만 대안 없이 무조건 들어주겠다는 식이 아니라 좀 더 적극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다.


책 제목이 <공감의 배신>이라 저자가 '공감'에 대해 비합리적 요소를 지닌 불필요한 감정으로 치부했으려니 했다. 전혀 그런 이야기는 아니고 다만 그는 인간사에서 공감은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가 콜레스테롤이 아니라 달콤한 탄산음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꾸 마시고 싶고 맛도 있지만 몸에 해로울 수밖에 없는 것들. 진정한 공감은 냉철한 이성적 판단을 동반할 때 빛을 발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