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Cool)한 이별

화사, <Good goodbye>

by 오행시

퇴근 후 여유시간에 하는 일 중에 하나가 SNS를 훑어보는 거다. 그중 페이스북은 하루에 두세 번 이상 찾는다. 요 며칠 사이 제46회 청룡영화상 시상식 축하무대 영상이 쇼츠나 짧게 편집되어 올라왔다. 가수 화사나 배우 박정민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알고리즘 탓이겠지만 궁금해서 유튜브를 찾아봤다.


무대는 가수 화사가 신곡 <Good goodbye>를 노래하는데 뒷부분에 박정민 배우가 잠깐 나타나 짧은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박정민은 무대를 내려온 화사에게 빨간 구두를 건네주고, 화사는 받아서 내던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노래를 이어갔다. 박정민은 무심한 듯 바라보다 마지막 구절에 맞춰 손동작을 하고 마지막 소절인 "Good goodbye"를 함께 불렀다. 이어 무대를 떠나는 화사 뒤에 대고 "구두 가지가"라는 멘트를 더하면서 짧지만 재치 있는 위트까지 얹었다. 이 장면은 실시간으로 주목을 받았고 여러 버전으로 패러디 됐다.


그리 길지 않은 퍼포먼스였지만 반응은 뜨거운 이유는 무엇일까? 경향신문(11.27일 자 이진송)에서는 '화사와 박정민이라는 연예인이 그동안 쌓아 올린 이미지와 그들이 걸어온 길이라는 역사가 있기에 가능한 조합이고 배경에는 이상적인 로맨스가 불가능해진 현실에서도 시들지 않는, 사랑과 수용에 대한 현대인들의 갈망이 깔려 있다.'라고 했다. 화사는 여성 연예인을 옥죄는 온갖 저울질, 특히 외모로 인해 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음악가로서의 실력과 역량이 뛰어남에도 외모에 밀리는 듯한 평가가 있었다. 박정민도 마찬가지로 외모보다 특이한 이력, 출판사를 운영한다거나 영화 속 역할이 자폐, 범죄인의 형상이 많다. 그러기 때문에 외모 1순위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영화제에 이들의 출연은 '의외의 조합'이 주는 신선함을 넘어 우리 시대가 갈구하는 어떤 '태도'를 보여줬기 때문일 것이다.


규격화된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서사를 쌓아온 두 사람이 무대 위에서 보여준 교감은, 소유나 집착이 아닌 서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건강한 사랑'의 풍경을 닮았다. 긴 세월 동안, 그게 언제부터인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50대인 나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여자 없다'식의 사랑 쟁취가 정답이라는 상황에서 청춘을 보냈다. 맞벌이여도 식구의 밥은 여자가 챙겨야 하는, 억압된 사랑을 의심할 수 없었다. 다행히 사회는 달라지고 있다.


하지만 요즘 청춘들에게 사랑은 설렘보다 먼저 '안전'과 '리스크'를 계산해야 하는 대상이 된 것 같다. 간혹 잔인하게 투영되는 교제 폭력과 스토킹 피해 뉴스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행위 자체가 공포의 심리극으로 치닫는 느낌이다. 풋풋한 '썸'은 방어적인 탐색전이 되고 그저 주위만 돌면서 깊은 관계 맺기를 주저한다. 사랑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한 시대라지만 이제는 그 용기가 상대의 폭력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한 생존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우리가 화사와 박정민의 무대에서 감동을 느낀 것은 서로를 압도하려 하지 않고 각자의 개성을 유지한 채 눈을 맞추던 '수평적 존중'때문이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세계를 나의 틀에 맞추어 재단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걸어온 울퉁불퉁한 길을 인정하고 그가 가진 고유한 빛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소유'를 시도한다. 내 마음의 크기만큼 상대도 반응해야 한다는 강박, 혹은 내 통제 아래 상대를 두어야 안심하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결핍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사랑이 모자라면 채우려 발버둥 치고, 넘치면 질식할 듯 상대를 옥죄는 순간, 그 관계는 이미 빛을 잃는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잘 헤어지는 법'에 대한 연습이 절실하다. 사랑의 결말이 반드시 '영원'일 필요는 없다. 관계의 유통기한이 다했음을 느꼈을 때, 혹은 오해와 갈등의 골이 깊어져 서로의 길이 달라졌을 때, 우리는 '쿨하게'돌아설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쿨함'은 감정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가 내 곁을 떠날 권리가 있음을, 그리고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그 자체로 충분했음을 인정하는 고도의 절제다. 상대를 억압하고 붙잡는 행위는 대개 '나의 상처'에만 매몰될 때 발생한다. 그러나 이별의 순간에도 상대는 여전히 독립된 인격체다. 그가 내 인생에서 퇴장하는 시간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연습, 그것이야말로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존중이다.


사랑이 두려운 시대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통해 구원받는다. 다만 그 사랑은 상대를 내 마음대로 바꾸려는 욕심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뜨겁게 사랑하되 차갑게 존중할 줄 아는 태도, 서로의 역사를 긍정하며 짧은 눈 맞춤 뒤에 각자의 길로 의연하게 걸어갈 수 있는 용기, 그런 담백한 사랑이 우리 청춘들의 일상에도 스며들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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