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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행시 Jan 07. 2023

장혀~ 우리 아가

어른 아이의 라떼

 인사발령이 났으니 짐만 싸면 된다. 나도 '기대'라는 걸 했는가?


 여느 때 같으면 전화도 많이 올 텐데 조용하다. 대규모 인사지만 박수받고 축하받을 사람은 드물다. 나머지는 분명치 않은 서운함과 짜증으로 쪼그라진 심장을 안고 총총히 나선다. 나는 후자다.


 조퇴를 신청하고 가방을 챙겨 나왔다. 갈 곳이 없다. 집에 들어가자니 스스로가 너무 없어 보인다.  비슷한 심정의 친구를 불러내 저녁을 먹을까 하다 그만두었다. 우리 둘은 메인 음식을 시켜놓고 일단 신나게 먹을 것이다. 그리고 찻집으로 이동해 달달한 위로와 격려가 토핑 된 후식까지 말끔히 해치우게 될 것이지만 결국 집으로 돌아가 거울 앞에서 칙칙하게 웃고 있는 내 얼굴을 마주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어쩐다'하며 잡은 운전대가 차갑다. 얼른 핸들의 온열 버튼을  누르고 천천히 차를 출발했다. 차를 살 때 꼭 있어야 한다고 우겼던 옵션이었다. 한겨울 유난히 손발이 찬 나에게 온열기능은 최고의 호사다. 아무리 추워도 이 기능만 있으면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20분 거리의 집까지 가는 동안 핸들은 아주 기분 좋을 만큼 따스해졌다. 30미터 앞에서 우회전을 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다.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확실한 것은 곧장 집으로 가지 않겠다는 것. 나는 우회전을 하지 않고 그냥 직진해 버렸다. 직진 도로를 따라 2킬로미터를 더 내려왔지만 집에서부터 멀어지니 약간 불안했다. 특별히 갈 곳도 없으면서 기름만 낭비하는 한심한 사람 같았다.  


코웃음을 치며 다시 집으로 향하는데 길 옆에 못 보던 카페가 눈에 띈다. 지난여름,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은 알았는데 벌써 가게가 입점해 있는 줄은 몰랐다. 꽤 넓어 보였다. 저기가 내가 가야 할 곳임이 틀림없었다.


 적당한 곳에 차를 주차해 놓고 카페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카페 특유의 커피 향이 진했다. 풍기는 냄새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아메리카노가 구미를 당겼지만 숙면을 위해 참았다. 카페라떼를 시키고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손님은 나를 포함해서 여자 둘이었다. 먼저 온 여인네는 탁자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라떼 위에 얹힌 우유거품을 멍하니 보다 연거푸 몇 모금을 마셨다.  6시도 안 되었지만 밖은 이미 한밤중의 포스로 위협당한 지 오래다. 몇 모금을 마셨는데도 거품이 만들어 낸 하트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하트, 심장, 사랑, 따스함, 편안함, 그리고 할머니? 두서없이 튀어나온 단어의 무질서의 끝은 '할머니'였다.


 '나, 지금 할머니가 보고 싶은거야?'


 내 인생에 할머니는 외가와 친가를 합쳐봐야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신 외할머니 밖에 없었다. 이젠 너무 오래전이라 할머니의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할머니는 막내딸인 우리 엄마가 일가친척 없는 먼 곳으로 시집와 고생한다며 일 년에 두어 번 우리 집에 오셨었다. 할머니가 오시면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하러 나갔고 할머니는 중풍으로 몸을 잘 가누지도 못하면서 우리 삼 남매의 끼니를 챙겨주셨다.


 그러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자 뜸하게 오시더니 외삼촌댁에서 주무시다 돌아가셨다. 부고를 듣고 다음 날 동생과 함께 와삼촌댁 마당에 들어섰다. 이미 문상 온 손님과 음식준비로 마당은 분주했다.


 그때까지 아무런 말이 없던 엄마가 들고있던 보따리를 팽기치며 '아이고땡'을 하기 시작했고 뒤 이어 여자 어른들 모두 흐느껴 울었다. 하지만 나는 슬프지 않았다. 울어보려고 눈을 찡그리고 엄마 옆에 무릎을 꿇고 않았지만 엄마의 곡소리가 창피하다는 생각만 들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함께 있는 동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안온함과 떠스함을 주셨던 분인데. 나는 냉혈인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매정하고 철딱서니 없던 손녀가 하늘의 명도 깨닫는다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 그것도 육십을 향해 서너 해를 건너온 지금, 할머니를 찾는다.


 게다가 전혀 엉뚱하게도 보고싶다고 한다. 그동안 할머니를 저장해 놓은 방의 열쇠를 잃어버렸던 것일까? 그러다 오늘 생천 저음 와보는 낯선 카페에서 그 방의 열쇠를 찾았는가 싶다.


 내 방 속에 계신 할머니는그말수가 적고 무뚝뚝하셨지만 꽤나 영리하셨다. 다리가 불편해서 잘 걷지도 못하셨지만 하루종일 몸을 움직이시며 집안 일을 하셨다. 저녁 어스름에는 마당에  있는 꽃과 나무 이름을 알려주고 크레파스로 그려보라고도 했다. 엄마를 기다리는 참새같은 아이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늘 무언가를 시키셨고 마무리는 부자연스런 고갯짓으로 우리를 내려다보며  '장혀'라고 했다.


영락없는 충청도 사투리로.


 생각해보니 할머니는 최고의 동기부여 지도사였다. 우리 삼 남매의 모든 행동이 '장하다'는 말을 듣는 것으로 종료되었다.


 학교 갔다 집에 오기만 해도, 닭장 안에 배추이파리를 넣어 주기만 해도,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막걸리를 받아와도, 막내 여동생이 댓돌 위에 주먹만 한 똥을 싸도, 할머니의 언어는 '장하다' 하나뿐이었다.


 내 딴에도 시시하게만 보이는 일들에 대해서도 장하다를 연발하시는 할머니는  바보 같았지만 그 말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주었다. 예쁜 꽃을 그리고 싶은데 모양이 틀어지거나  크레용을 너무 칠해 거무튀튀하게 된 꽃그림 마저도 장한 작품으로 둔갑되었다. 속상한 마음에 징징 짜고 있으면 언제고 할머니는 그러셨다.


  '그래도 우리 아가는 장혀'

 

 할머니가 곁에 계셨다면 별것도 아닌 일에 비루한 꼴로 앉아 있지만 그래도 장하다고 하셨겠지.

인사발령에 대한 낙담으로 코가 납작해진 손녀의 등허리를 쓰다듬어 주실 것만 같다.


 어른이라도 모든 걸 잘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인생이 그렇게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모든 것들을 조용히 받아드리고 있는 나는 장해지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내 노력에 비해 낮게 주어진 자리, 그동안 기여했던 모든 것들이 남들 눈에는 하찮은 것으로 비친 것에 대한 모멸감이 사라질 수 있도록 하는 마법 같은 말, '장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인사발령이야 길어야 1년이나 2년 후면 또 있을 것이다. 다만 기대가 컸던 것뿐인데 나만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말로는 놓았다 하면서도 아직도 더 오르려는 욕심의 끈을 단단히 잡기에 생기는 일들. 이  끈을 느슨하게 잡아도, 심지어 과감하게 놓아버려도 되지만 아무도 나에게 '장하다'라고 하지 않는다. 오로지 앞으로만 가야 하는 게 정답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후진하는 나에게 '장혀'를 해줄 수 있는 다정한 어른, 그래서 할머니가 보고 싶다.


7시가 되어가고 있다. 라떼는 이미 식은 지 오래. 나는 할머니를 그리워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갈 곳 몰라 허둥댔던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움에 목이 메는 순간이 있었지만 지금은 어른처럼 앉아있다.


 할머니 영정사진을 보고도 멀뚱 거리며 슬픔을 헤아릴 줄 몰랐던 열 다섯 소녀가 사십여 년이 지나서야 할머니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을 갖는다. 지금을 위해 슬픔을 아껴두었을까? 어쩌면 어느 날 아무런 상관없는 장면에서 나는 또 할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다. 어른이지만 아이일 때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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