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증후군
나는 어둠상자를 품고 산다.
상자는 그 누구도 열어 볼 수 없으며 엄청 무겁고,
상자보다 거대한 자물쇠로 잠겨있다.
그 속에는 온통 검정으로 물든 단어로 가득 차 있다.
질투, 시기, 우울, 슬픔, 분노, 실망, 실패, 걱정, 비웃음, 초조, 불안, 갈망, 욕심, 이기심, 열등감, 하락, 관계 단절, 죽음 ...
이런 비슷한 단어들이 어둠상자 안에 숨어있다.
그게 어둠상자 밖의 세상이 아주 깨끗하고 순수하며 반짝반짝 빛나는 이유이다.
그러나 어둠상자가 꽉 차다 못해 터져버리면
상자 밖 세상의 빛나는 단어들조차 검정으로 물들어
조그마한 빛 하나 존재하지 않는,
어둠상자 속 보다
더 어두운 블랙아웃이 된다.
블랙아웃이 되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는
검정 단어들이 어둠상자 밖으로 빠져나오기 전에
미리 어둠상자를 비워줘야 한다.
그때 나는 그 어둠상자를 동굴 속 깊은 곳에 들고 들어간다.
동굴 안
한 점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 주저앉으면
그제서야 내 새끼손톱보다 작은 열쇠로 어둠상자를 열어본다.
그때 흐르는 적막을 내 울음소리로 가득 채운다.
그리고 이미 새까맣게 타버린 단어들
하나하나 꺼내어 들여다보며
상자 밖 동굴 속으로 풀어준다.
그렇게 추운 겨울 동안
동굴 속에서 단어들을 풀어줄 때
동굴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도
나는 못 들은 척한다.
사실 검은 단어 속에 갇혀서
못 나올 때가 더 많았지만
동굴 밖 밝은 소리들을 내 울음소리로 차단한다.
한 번씩 동굴 안으로 반딧불이가 들어올 때
나는 그 빛이 참 고맙고 소중하지만
그게 또 안쓰럽다.
금세 흑 색으로 물들어버릴 것을 알기에
너무 안타깝다.
그렇게 동굴에서 어둠상자를 비우고 나면
다시 빛 속에서 파묻혀 살지만
어둠상자가 계속 생각난다.
지난겨울,
또 동굴에 들어가
어둠상자 속 글자들을 놓아주고 있었는데
검은 글자들이 쉴 새 없이 나왔다.
어둠상자를 비워야
내가 빛 속에 있을 수 있다고 하기에
어둠상자를 뒤집어 탈탈 털었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끝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큰 소리와 함께
결국 내가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다.
어둠 동굴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
그냥
펑 하고 터져버렸다.
세상은 온통 칠흑 같은 밤이었고 별 하나 없었다.
어둠상자도
어둠 동굴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내가 빛을 나눠줬던,
나에게 빛을 나눠줬던,
모든 사람들이 떠나가고 진짜 혼자가 되었다.
아니,
이젠,
차라리,
내가 그 답답한 암흑 속에서 빛나는
밝은 별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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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성 우울증을 겪는 사람은 대부분 위장의 달인이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조차 이상한 점을 눈치채기 쉽지 않다.
가끔은 자기 자신도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 못한다.
과거에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었다가 무시당하거나 상처를 받았던 경험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누군가의 비밀을 들어주더라도 그 비밀을 자신의 어둠상자에 가두거나
자신의 속마음도 소중한 사람들에게 부담이 될까 털어놓기 무서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