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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Jan 04. 2022

대표주자 하나로도 국립공원이 된 삼총사

미국인도 모르는 미국의 속살을 찾아서

요즘 혼밥족부터 혼술족에 이르기까지 ‘혼자’라는 말이 부끄럽다거나 외롭다는 의미를 담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다는 이미지로 해석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다른 각도에서는 식당 메뉴가 하나일 때 우리는 장인정신을 떠올리며 독특한 비법에 대한 기대감을 갖기도 한다.

이렇듯 하나의 자연물만으로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국립공원이란 이름표를 내건 Sequoia National Park(세쿼이아 국립공원), Congaree National Park(콩가리 국립공원), Joshua Tree National Park(조슈아 트리 국립공원). 울창한 숲과 습지, 사막이라는 대조적인 지역인 만큼 대표주자들의 개성도 남다르다.    


자연이 인간의 한계치를 측정해 주는 곳, Sequoia National Park

그곳을 찾아 가는 길에 주렁주렁 열린 오렌지 나무들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마치 썬키스트 오렌지 주스 광고 입간판을 보는 것만 같았다.

눈으로 오렌지 주스 한 잔을 마시고 가다보니 국립공원 초입에 사람들이 높은 바위 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바위 아래로 차들이 지나가는데 일명 Tunnel Rock(터널 바위).

그 터널을 통과해서 국립공원에 들어서는 순간 눈으로 어림짐작이 불가능한 높이와 둘레의 나무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어서 마치 걸리버 여행기의 거인국 숲에 들어선 소인국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초입부터 여기저기 첫 인사가 “와~~”하는 감탄사인데 그것도 잠깐, 나중에는 높이와 둘레 개념이 사라지고 거대한 자연이 주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신비로운 침묵에 휩싸이게 되는 Sequoia National Park(세쿼이아 국립공원). 눈앞의 풍경이 갈수록 태산이 아니라 볼수록 거목이 산처럼 줄 서있는 곳, 이름 그대로 Giant Forest.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에서 가장 부피가 큰 나무의 이름이 ‘GENERAL SHERMAN TREE’로 인간 세계의 장군 이름이라는 사실. 밑동 지름이 11m, 높이 84m, 둘레 31m에 수령이 2,200년인 거인 장군인 것이다. 감이 안 잡힌다면 27층 건물 높이에 어른 스무 명 정도가 양팔을 벌리고 에워쌀 정도의 둘레라면 감이 오지 않을까 싶다. 장군 나무를 만나기 위해 BIG TREES TRAIL을 걸었는데 이곳 표지판에는 ‘Giant’ 혹은 ‘Big’이란 단어가 유난히 많다. 그런 단어들이 제대로 쓰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건 그곳에서 보는 풍경에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넘어서 모든 것들이 무지 크고 무지 높았기 때문이다.

셔먼 장군 바위는 가히 가요계의 방탄소년단이라 할 정도로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해서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데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기다려서 차례가 와도 높이가 너무 높다보니 거의 누워서 찍지 않으면 셔먼 장군 나무의 위용과 함께 할 수 없다. 그래서 찍는 사람들이 연출하는 각양각색의 포즈를 보는 것도 특별한 재미다.

거기에 셔먼 장군 나무를 만나러 가는 길에 나타나는 진기한 풍경들을 사진에 담아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세 그루의  나무들이 하나로 이어져 자라는 모습, 어떤 거인이 화가 나서 뽑았는지 거대한 세쿼이아 나무가 뿌리째 뽑혔는데 그 옆에 선 사람이 잔뿌리보다 작은 모습, 나무 안이 뚫려 있어서 걸어 들어갔더니 무려 길이가 10여 m이고 폭도 넓어서 어린 아이들이 소꿉놀이 장소로 안성맞춤인 모로 누운 나무, 수십 명이 인간 띠를 두르고 세쿼이아 나무의 둘레를 재고 있고 그 옆에서는 인간 띠의 사람 수를 세는 또 다른 사람들의 모습, 발부리에 차이는 갈색 수류탄처럼 생긴 게 있어서 주워 보니 내 얼굴 보다 조금 작은 자이언트 솔방울들, 넘어진 나무의 밑동을 보며 나이테를 세는 사람들의 진지한 모습과 세다가 지쳐 포기하고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 거대한 존재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며 하늘을 향해 셔터를 눌러 대는 사람들의 모습들까지.

세쿼이아 국립공원의 또 하나의 볼거리는 Tunnel Log(터널 로그). 거대한 세쿼이아 나무가 길을 막고 쓰러져 있고 그 나무 아래 부분에 높이 5m에 폭이 10m인 구멍이 뚫려 있어 승용차 두 대가 쌍방으로 지나갈 수 있는 나무 터널이 그것이다. 처음에는 통과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지나고 나니 놀이기구를 탔을 때의 놀랍고 신기한 기분이었다. 만약에 세쿼이아 나무가 우리 차를 봤다면 “저 아래 딱정벌레 한 마리가 지나가는군!” 했으리라.

자연이 만든 세쿼이아 숲을 지나오다 보니까 인간이 만든 뉴욕 맨해튼의 마천루가 겹쳐졌다.

처음 뉴욕의 야경을 봤을 때 그 건물들의 평균 높이가 거의 70~80층이라는데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렇듯 세쿼이아 나무와 마주치는 순간 떠오른 ‘하늘을 찌르는 듯한’이란 표현이 적재적소에 쓰인다면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쿼이아 나무가 만든 천연 마천루는 우리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을 보여 준, 경이로운 신비 그 자체였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며 자라는 Knee, 니들이 아는가?

태고의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한 미국 최대의 늪지대이자 활엽수림의 본고장인 Congaree National Park(콩가리 국립공원)의 대표주자는 바로 Bald Cypress와 Knees.

번호가 붙여진 보드워크를 따라 걷는 BLUFF TRAIL 양옆으로 이끼로 덮인 나무들이 서있기도 하지만 뿌리가 뽑힌 채 쓰러져 있고 어떤 나무들은 뿌리들이 지면 위로 손가락들처럼 울퉁불퉁 나와 있는 등 다양한 포즈의 나무들이 밀림지대를 이루고 있다.

그러다 아주 기묘한 것들이 계속 나타나며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는데 그것들은 잎이 달리지 않아 벌거벗은 밑동들이 여기저기 솟아나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자연의 법칙을 거부한 채 거꾸로 자라려는 강한 의지를 지닌 생명체처럼 보였다. 그 의지의 주인공은 Knee라 불리는 뿌리인데 천지가 그들만의 세상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Knee가 연출하는 진풍경을 만끽하기에 충분했다.

자연도 인간처럼 순응파가 있고 반골기질을 지닌 저항파가 있다면 Knee는 후자가 아닐까 싶다. 모든 식물은 하늘을 향해 자라는 게 이치라고 하지만 Knee는 왜 뿌리인데도 하늘을 향해 자라는 걸까? 과학자들도 이 Knee의 기능을 규명하지 못했다고 하니 그 비밀은 그대 Knee만이 알리라. 나처럼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Knee를 바라보는 걸 보면 Knee를 보는 이들의 의구심은 동서양 모두 똑같은 것 같다.

처음에 들어섰을 때는 디즈니 만화 영화 ‘정글북’의 모글리와 블루가 함께 놀던 정글이 연상되다가 수천 개의 Knee들이 큰 나무들 사이에 솟아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릴 때 본 만화영화 ‘스머프’로 옮겨간다. 예전에 터키 카파도키아에서 봤던 버섯집이 스머프 집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하니 인공지능이 판치는 세상이지만 자연이 인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아직도 무궁무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Knee의 기능을 알 수 없으니 밤이 되면 Knee들이 요정이 되어 다닌다는 원주민들의 믿음에 동의할 수밖에. 그래서 Knee를 통해 자연의 신비는 영원히 신비스러울 것만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WESTON LAKE LOOP를 따라 걷다 보면 강처럼 커다란 WESTON LAKE(웨스턴 호수)를 만난다. 마침 비가 와서 진초록 수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모습은 도시에서 보는 비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눈은 빗방울의 현란한 몸짓에, 귀는 온전히 빗소리에만 몰입할 수 있는 정(靜)의 세계를 맛볼 수 있었다. 바쁘다 보니 비를 맞지 않으려 애쓰고 빗소리는 소음에 묻힌 지 이미 오래되었기에 도시에서 ‘비를 본다‘ 혹은 ’비를 듣는다‘라는 표현이 현실적이지 않은 현실임을 생각할 때 이 풍경은 우리에겐 또 하나의 신선한 선물이었다.

열대 원시림을 글자로만 접했을 때는 조금은 무섭고 오싹한 신비가 가득할 것만 같았는데 막상 와서 보니 정적이 주는 편안함과 Knee들이 주는 신비에 이끌려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낮에는 기본 의식주만 해결한 후 독서와 산책, 명상을 즐기다가 밤이 되면 요정으로 변신한 Knee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판타지 소설 한 편은 거뜬히 쓸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열대 원시림 속에서 잠시나마 원시인이 될 수도 있는 곳, Congaree National Park(콩가리 국립공원). 미국의 많은 국립공원을 다녔지만 정글 분위기도 독특한데 거기에 반골기질의 Knee까지 만날 수 있는 이곳이야말로 진흙 속에 묻힌 진주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마음의 길을 잃은 자들이여, 조슈아 나무로 오라!

Joshua Tree란 이름은 사막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여호수아와 같은 모습을 한 이 나무를 보고 길을 찾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 이름이 주는 심오함은 콜로라도 사막과 모하비 사막이 만나는 곳에 펼쳐진 Joshua Tree National Park(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에 들어서는 순간 사막이 주는 건조한 성령이 우리 가슴으로 모셔지듯 경건하게 펼쳐진다.

사막에 내리꽂는 강한 햇빛을 우러르듯 양팔을 벌리며 서있는 조슈아 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바위를 쌓아 놓은 바위산은 신전인 듯하고 그 아래 두 팔을 벌린 조슈아 나무들은 신전을 우러러 신을 경배하는 신도들처럼 보였다. 태양이든 하느님이든 옆에 있는 사람이든 누군가를 선택해서 나도 두 팔을 벌려야 할 것만 같았다.

먼저 Hidden Valley Trail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두 팔을 벌리다가 조슈아 나무의 뾰족한 잎에 찔리는 일은 다반사다. 이 때 드는 생각이 지난 일들의 사소한 과오에 대한 따끔한 일침인 것만 같아 종교가 없는 나조차도 저절로 반성모드에 들게 했다. 여행 중 참회의 기도까지는 아니어도 잠시나마 나를 돌아볼 수 있게 해준 조슈아 나무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하는 기도를 전해 본다.

조슈아 나무를 따라 걷다보면 또 다른 풍경들이 우리를 반긴다. 조슈아 나무와의 만남이 지루할 때쯤이면 바위 군상들이 나오는데 그 바위는 암벽 등반에 최적의 바위산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암벽 등반을 즐기고 있었다. 우린 암벽 등반 눈요기만 하고 있는데 애완견 한 마리가 주인의 등 뒤에 타고 암벽을 오르고 있었다. 역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이 실감났다.

수천 년 동안 바람이 어루만져주고 빗물이 적셔주면서 다듬어진 바위의 모양은 조슈아 나무의 계시를 따르듯 모나지 않은 둥근 모양이 바위 천국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중 유명한 바위가 있다는 Skull Rock Trail. 엄청난 바위들 사이로 한참을 올라가서 우리의 목표물인 Skull Rock(해골바위)을 만났다. 거대한 바위인데도 밤에 보면 섬뜩할 정도의 해골 모양으로 다듬어진 바위였다.

먼 훗날 조슈아 나무의 가르침을 따르며 풍화의 시간을 견디고 나면 천사바위로 변신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며 내려왔다. 내려오다가 동굴 벽화가 몇 곳 있는데 수백 년 전 그곳에 살던 인디언들이 그린 새, 도마뱀, 뱀, 조슈아 나무, 사람의 손과 발 등이 너무도 선명해서 깜짝 놀랐다. 인간의 표현 욕구는 시대를 초월하는 것 같았다.

하늘을 향한 인간의 기도 내용이 내 눈 앞에 펼쳐진 조슈아 나무만큼이나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조슈아 나무 아래서 나만의 기도를 해본다.

얼마 전 미국의 무관용 이민정책으로 멕시코 국경 주위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 때 나는 조슈아 나무에게 급하게 전보를 쳤다.

 ‘그 아이의 울음을 멈출 수 있는 따스한 위로와 온전한 평화가 깃든 기도문을 그곳으로 전해 주기를 바랄게, 조슈아 나무야!’라고.    


이 세 곳을 아우를 수 있는 노래가 떠올랐다. 다름 아닌 우리가 어릴 때 불렀던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들 같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나무들 같이~”라는 동요 ‘어린이 노래’.

세쿼이아처럼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럼 없이 올곧게 살아간다면 어떠한 고난이 닥쳐도 Knee처럼 저항하는 의지로 이겨낼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때마다 두 팔 벌린 조슈아가 은총을 내려 주리라.

팍팍한 인생살이가 이정표 없이 펼쳐진 황량한 사막이라면 조슈아 나무는 우리가 갈구하는 것을 들어줄 것만 같은 신과 같은 안식처라는 생각이 든다. 늘 평탄하다면 좋겠지만 인생이란 자가 롤러코스트를 즐기다보니 우리에게 아찔한 순간을 던져줄 때도 있다. 그럴 때 내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부드러운 손길이 있다면 그 상황이 외롭지 않을 것이다. 그 손길이 꼭 신일 필요는 없다. 자연 중 하나를 선택해서 경외한다면 그 대상이 바로 나만의 유일신이 아닐까 싶다, 내게 다가왔던 조슈아 나무나 곧게 뻗은 세쿼이아 나무처럼, 혹은 이육사 시인이 들려주는 교목처럼.     


<교목>         이육사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이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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