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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Jan 04. 2022

오지를 오지게 다녀왔습니다

미국인도 모르는 미국의 속살을 찾아서

바람과 햇살이 좋은 날이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그곳이 남들이 가지 않는 오지라면 더욱 구미가 당긴다. 그래서 오지 속을 다시 걷다 보니 오지가 주는 매력은 익스트림 절정에  도달하는 순간의 짜릿한 쾌감이 아닐까 싶다.

누구나 한번쯤 해봤던 림보게임을 세로로 해놓은 듯한 그랜드 스테어케이스-에스칼랑트 국가기념물(Grand Staircase-Escalante National Monument), 천사가 내려앉은 곳이라는 이름처럼 자칫하면 천사가 되는 엔젤스 랜딩(Angels Landing), 영화 마션의 배경인 화성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드는 버밀리언 클리프 국가기념물(Vermilian Cliffs National Monument) 안에 있는 화이트 포켓(White Pocket)까지 3인3색의 오지로 탐험을 떠나 보자.


뚱뚱이 NO! 홀쭉이 YES! 외모차별이 허용되는 곳, 그랜드 스테어케이스-에스칼랑트 국가기념물

유타 주 남부 케인 카운티와 가필드 카운티에 걸쳐 있는 이곳을 찾아가는 여정도 이름 길이만큼이나 길었다. 비지터 센터에 도착하니 우리를 반긴 건 청동 도마뱀 조각상이었고 왠지 우리 여정에 자주 등장할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면서 이건 길조일까 흉조일까 잡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우리의 애마는 비포장 길을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몇 시간 달려서 도착한 곳은 투톤의 바위들이 크기도 다양하게 기기묘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Devil’s Garden>.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우정을 자랑하는 악마들, 머리에 모자를 쓰고 위엄을 떠는 악마, 미스코리아 포즈를 취하고 한 줄로 쭉 서서 포토타임을 즐기는 섹시한 악마들,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벌 받는 듯한 악마, 폭염 속 우리에게는 고문관이었던 월드콘 아이스크림을 쥔 악마, 두 손을 맞잡고 애절한 눈빛을 교환하는 악마 연인, 그 둘이 만든 문을 보며 어릴 때하던 “남 남 남대문을 열어라~~” 놀이를 떠올리는 인간 악마까지. 오랜만에 어느 하나도 같지 않은 개성 넘치는 악마 바위 군상들이 무서움 보다는 귀엽게 느껴지는 건 내게도 혹시 악마의 기질이 있나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였다.

 악마 정원을 지나서 찾아간 곳은 여기의 하이라이트인 좁고 긴 협곡이 크레페처럼 겹겹이 이어져 있는 거대한 계단형의 스트레이트 절벽(Straight Cliff). 드디어 ‘DRY FORK TRAIL’ 표지판과 그 아래에는 사륜 SUV만 허용된다는 경고를 만났다. 거기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 방명록까지. 여행을 다녀보면 위험지수가 높을수록 방명록을 썼던 기억에 불안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당당하게 한글로 이름 석 자를  썼다.

붉은 바위를 옆에 두고 걷다보니 동행자들이 나타났다. 땅에는 도마뱀, 하늘에는 까마귀들이.

이름 속 Staircase(난간으로 이어진 계단)가 언제쯤 나오나 하며 걷다보니 아주 작은 틈이 우리 눈길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동시에 “저기다!”를 외치며 내부를 들여다보니 겨우 사람 한 명 그것도 날씬한 어른이 지나갈 정도의 틈이 미로처럼 웨이브 춤을 추듯이 이어져 있었다. 운동회나 야유회 때 하던 림보게임이 떠올랐는데 여기서는 위아래가 아닌 좌우로 방향이 바뀐 느낌이었다.

입구에 비만인은 출입금지라는 경고문이 있어야할 정도로 폭이 좁은 미로들이 예측할 수 없이 이어져 있었다. 저기를 돌면 뭐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계속 일어나는 곳, 모서리를 돌면서 ”까꿍“하고 정겨운 인사도 나눌 수 있고 서양에서도 까꿍(Peek-a-boo)놀이를 즐겨한다는 걸 알게 해 준 피카부 슬롯 캐년(Peek-a-boo Slot Canyon). 공중곡예도 하면서 아래 배에 힘을 주며 한 사람씩 지나가다가 다른 사람과 마주치는 일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으스스한 고요가 무섭게 다가온 스푸키 슬롯 캐년(Spooky Slot Canyon).

무서움을 이기는 최고의 방법은 달콤한 초콜릿을 먹는 것이기에 우리는 움푹 팬 바위에 앉아 달달한 디저트 타임으로 무서운 피로를 풀었다. 림보게임을 즐기며 마지막 출구에 도착하니 수심이 2m가 넘는 웅덩이를 통과해야 하는 뜻밖의 미션이 기다리고 있었다. 옷과 신발, 수건 등을 미리 준비해 오지 못해서 우린 할 수 없이 되돌아 나와야 했다. 나와서 차를 타려고 보니 림보게임을 마치고 온 우리에게 수고했다는 듯이 앞쪽 범퍼가 덜렁거리며 손짓하고 있었다. 비포장 길을 달리다가 난 사고인데 우리는 전혀 눈치를 못 챈 것이었다. 탁 트인 공간이 아닌 밀폐된 공간에서의 미로체험이 몸과 마음을 다이어트 시켜 주었다. 이토록 귀한 체험을 주기 위해 희생한 범퍼에게, 비만이 아니어서 신나는 모험을 즐기게 해준 한국인 표준체형인 우리 몸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해 본다.    


잘못 내려앉으면 진짜 천사가 되는 곳, 엔젤스 랜딩(Angels Landing)

유타 주 남서부 자이언 국립공원(Zion National Park)에 있는 높이 1,765m의 암석 꼭대기를 향해 만들어 진 트레일로 천사들만이 닿을 수 있다는 엔젤스 랜딩(Angels Landing).

극한체험의 절정을 찾아 셔틀버스를 탔을 때만 해도, 내려서 밧줄을 풀어놓은 듯 꼬불꼬불한 트레일을 나선형으로 올라갈 때만 해도, 밑에서 위를 우러러보며 감탄사를 연발할 때만 해도, 그늘 없는 길을 따라 걸으며 온몸이 땀으로 젖었을 때만 해도 여느 국립공원과 다르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다 ‘올라가기도 매우 힘들고, 절벽이 노출된 길도 좁아서 뇌우나 어둠, 눈이 오는 상황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는 약한 경고문에서 ‘2004년 이후로만 6명이 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강한 경고문까지 읽고 나니 몸도 마음도 조금씩 긴장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쇠사슬도 잡으랴, 정신 줄도 잡으랴 “바쁘다 바빠!”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인수봉의 경험을 떠올리며 애써 위안을 삼았다.

쇠사슬을 붙잡고 100m 정도 올라가서 아래를 보니 왼쪽은 버진강(Virgin River)까지 300m의 수직 절벽이, 오른쪽은 100m 넘는 절벽들이 줄지어 우리들의 표정을 살피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위에 서 있는 우리가 오히려 신기하게 여겨지면서 고립무원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드디어 쇠사슬도 사라지고 경고문에 등장했던 일명 ‘면도칼 바위‘가 나타난 순간엔 “와우”라는 탄성마저 얼어붙어 버렸다. 폭이 1m 정도라서 한 사람이 지나가야만 건너편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좁은 바윗길을 약 반 마일(800m) 정도 걸어가야 만날 수 있고, 정신 줄을 놓는 순간 황천길로 직행하는 곳이 바로 엔젤스 랜딩 정상이다. 양쪽엔 천 길 낭떠러지인데 펜스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발만 믿고 건너야 하는 곳. 그래서 고소공포증이나 오금이 저린다는 표현도 사치일 수 있는 곳에서 우리는 “당신 먼저 가세요.”라며 양보가 미덕이라는 공익광고까지 찍는 상황에 도달하고 말았다.

 

먼저 가면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남편의 유혹에 넘어가 내가 먼저 출발! 앞만 보고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온몸에 찌릿찌릿 전기가 오르고, 안 보려고 해도 눈이 양옆의 절벽에 가 꽂히는 탓에 심장 박동 수는 무한대로 빨라지고 있었다. 그래도 인증 샷이자 인생 샷을 찍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김치”하고 찍고 나서 랜딩에 성공. 끝에 가니 바위틈 사이에 작은 나무 한 그루가 단아하게 서 있었다. 엔젤스 랜딩 미션을 완수하고 돌아온 전사들에게 따스한 위로와 격려를 보내는 천사가 변신한 것처럼. 그곳에서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절벽뿐인데 그 순간엔 공포심보다는 해냈다는 뿌듯함이 우리 가슴을 가득 메웠다.

 승자의 여유를 즐기며 건너편을 보니 손과 발을 총동원해 기어서 오는 꼬마, 공포영화를 보듯 벌벌 떨며 오는 아가씨, 그곳에서도 카메라 렌즈를 바꾸며 자신의 등산화와 아래 절벽을 찍는 대범한 아저씨, 양옆에 투명 펜스라도 있는 듯 전혀 겁먹지 않고 담담하게 걸어오는 아줌마, 멋진 풍경을 보여주려고 등산용 캐리어에 아이를 태우고 온 딸 바보 아빠, 다섯 명의 가족이 병정놀이하듯 발을 맞추며 건너는 화목한 가족, 남녀가 일심동체가 되어 앞뒤로 꼭 붙어서 건너는 커플 등을 보면서 엔젤스 랜딩의 인기를 실감했다. 하산하면서 내려다보니 우리가 걸어서 올라온 지그재그 모양의 길이 천국의 계단처럼 보였다.

마치 천상계의 여행을 마치고 인간계로 돌아가는 것처럼. 이런 느낌은 엔젤스 랜딩이 준 선택지를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메운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값진 보답이리라. 그 보답을 마음에 담고 내려와서인지 마음도, 발걸음도 날아갈 듯 가벼웠다.

Thanks Angels Landing, you’re an angel! (엔젤스 랜딩 고마워요, 엔젤스 랜딩 최고!)


지구 같은 화성, 화성 같은 지구-화이트 포켓(White Pocket)

유타 주와 아리조나 주에 걸쳐 있는 야생보호지대인 버밀리언 클리프 국가기념물(Vermilian Cliffs National Monument) 안에 있는 화이트 포켓(White Pocket). 이곳은 전 세계 사진작가들이 일생에 처음 보는 오묘한 풍광을 사진에 담고자 기를 쓰고 찾아오는 곳이자 동쪽과 남쪽, 북쪽이 모두 절벽이라 오직 서쪽에 있는 House Rock Valley Road로만 진입이 가능하고 모래가 쌓인 비포장도로를 두 시간 이상 달려서 가야 하므로 사륜구동 차만이 가능한 오지 중의 오지다. 여기서 포켓은 주머니가 아닌 고립된 지역에 윤곽이 뚜렷한 광석 무더기를 의미하므로 화이트 포켓은 고립된 지역에 홀로 우뚝 서 있는 하얀 바위 지대를 말하는 것이다.

안내판에 “충분한 식량과 물, 그리고 지도를 준비하라”는 문구를 읽는 순간 왠지 비장한 각오를 하고 떠나야 할 것만 같았다. 우리도 근처까지 갔는데 갑자기 내비게이션이 작동이 안 되고 지도를 보아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 한 시간 가량을 뱅뱅 돌면서 헤맸다. 사람도 없는 곳인지라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두려워지기 시작했지만 몇 개의 사진을 단서로 드디어 화이트 포켓을 찾았다. 막상 가서보니 이곳이 지구일까 아니면 다른 행성일까 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로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자연이 만든 걸작들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지구를 떠나 영화 ’마션‘의 촬영장인 화성(Mars)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퇴적층이 완전히 굳기 전 부드러운 상태에서 지각 변동에 의한 중력의 작용, 표면에 흐르는 물의 영향과 지진 등이 합동하여 만든 작품들이 ‘화성으로의 초대전’을 열고 있었다. 신(神)이 붉은 진흙판 위에 스크래치를 낸 듯한 작품, 하얀 거품이 굳어진 것이 우리 몸 안의 대장과 소장을 빚어 놓은 듯한 작품, 주름진 붉은 물결무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는 작품, 에드워드 뭉크의 ’절규‘의 표정을 짓고 있는 바위, 영화 스타워즈 다스베이더의 헬멧 같은 바위, 키세스 초콜릿 바위, 뚱뚱한 마카롱 모양의 바위들이 만들어 낸 디저트 카페 작품, 흰색 사이사이로 빨간색, 분홍색, 노란색, 갈색 등이 나타나면서 독특한 색채 조화미를 드러내는 작품, 박수근 그림 속 아이를 업은 소녀의 모방작 같은 작품 등을 보다 보니 어느덧 화성 여행이 끝나가고 있었다.

머리를 부딪치며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다 푹푹 빠지는 모래 길을 지날 때면 혹여 바퀴가 빠질까봐 가슴 졸이며 올 때만 해도 두 번 다시 오지 않겠다는 다짐이 화이트 포켓을 본 순간 “세상에 이런 풍경이...”라며 말을 잇지 못할 정도의 감동으로, 더 나아가서 죽기 전에 꼭 다시 와봐야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바뀐 것도 화이트 포켓이 부리는 마법의 힘이리라. 덧붙여서 버밀리언 클리프 국가기념물 오지 세 곳인 웨이브(Wave), 코요테 언덕(Coyote Buttes) 그리고 화이트 포켓 중 이곳만이 허가증(Permit)이 없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주 정부도 이리 험한 곳은 ’가고자 하는 사람들만 알아서 가라, 그 수는 많지 않을 것이다‘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버밀리언이 주황색 물감 이름이라 그곳은 온통 주황색 절벽이 병풍처럼 끝도 없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그 주황색을 거부하고 흰색을 고집하는 반항아, 오지에 숨어서 우리를 찾아가게 만드는 나쁜 남자, 그러나 자신을 찾아오느라 수고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보여주겠다는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화이트 포켓에서 우리가 찍은 영화 ‘지구에서 온 남자, 화성에서 온 여자’의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있었다.

Jeep Wrangler, Best Driver Mr. Park, Assistant Mrs. Park, Canon DSLR, Tripod, HARIBO, Beef Jerky, Cooler Bag, 건강한 몸과 긍정적인 마음의 협찬에 감사드립니다.

자연이 보여준 경이로움에 심장주의보가 발동되는 곳, 다리 힘 빠지기 전에 꼭 가봐야 할 버킷리스트 일순위인 오지 세 곳을 오지게 다녀왔다. 오지이다 보니 중간에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면 서로 바라보며 짓던 무언의 웃음이 박카스가 되고, 꼭 잡은 두 손이 에너지바가 되었다. 그 시간들 위로 오지 속 풍경들이 세 편의 여행 다큐멘터리로 편집되어 오늘도 우리의 추억 방송국에서 상영되고 있다. 가끔은 사는 게 힘들고 팍팍할 때 누구도 줄 수 없는 위안을 건네는 다큐멘터리가 우리에겐 심리치료사인 듯하다. 극한으로 가는 길에 느끼는 지옥 같은 고통도, 극한의 꼭대기에서 맛보는 절정의 기쁨도 한 순간이기에 떠나고 싶을 때 주저하지 말고 떠나라고 오지들이 목소리 높여 우리에게 말한다. 그 외침을 듣고 우리는 다시 지도를 펼치고 여행 가방을 꾸리며 또 하나의 여행 다큐멘터리 준비에 마음이 설렌다. 여행지의 모든 길도, 모든 여행자들도 지구처럼 동그랗게 다시 만날 수 있기에.    


<동그란 길로 가다>           박노해    


누구도 산정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누구도 골짜기에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삶은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을 지나

유장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가는 것    

절정의 시간은 짧다

최악의 시간도 짧다    

천국의 기쁨도 짧다

지옥의 고통도 짧다    

긴 호흡으로 보면

좋을 때도 순간이고 어려울 때도 순간인 것을

돌아보면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것이 아닌 것을

삶은 동그란 길을 돌아나가는 것    

그러니 담대하라

어떤 경우에도 너 자신을 잃지 마라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위엄을 잃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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