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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Jan 04. 2022

화산이 빚은 황홀경에 빠지다

미국인도 모르는 미국의 속살을 찾아서

‘화산’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재난일 것이다. 그런데 화산이 남긴 유산이 이렇게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곳이 옐로스톤 국립공원(Yellowstone N.P)과 크레이터 레이크 국립공원(Crater Lake N.P), 래슨 화산 국립공원(Lassen Volcanic N.P) 그리고 선셋 크리에이터 화산 국립천연기념물(Sunset Crater Volcano National Monument)과 데빌스 타워 국립천연기념물(Devils Tower National Monument) 다섯 곳이다. 달아올랐던 여름을 보내며 뜨거운 여행을 떠올린 건 아마도 그 뜨거운 기운이 주는 신비한 감동 때문이리라. 그것이 우리를 흔들어 깨우면 우리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어디든지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이 가까운 공원이든 먼 곳의 섬이든지. 우리가 너무 큰 풍경을 찍을 때면 렌즈 안에 다 담지 못해 아쉬울 때가 많다. 그런 느낌이 드는 곳, 너무도 넓고 거대하기에 언어로도, 사진으로도 표현의 한계를 느끼는 곳 그러나 그 감동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곳이 바로 이 다섯 곳이다.    


대자연이 빚은 용광로, 옐로스톤 국립공원(Yellowstone National Park)

미국 국립공원들의 경연 대회가 있다면 단연 그랑프리는 옐로스톤 국립공원. 그 이유는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이자 미네랄이 풍부한 온천수가 석회암층에 흘러내리며 바위 표면을 노랗게 변색시켜 붙여진 이름처럼 다른 국립공원에서는 보기 힘든 300 여개의 간헐천과 크고 작은 1만 여개의 온천이 연출하는 버라이어티 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의 세 배가 넘는 광대한 지역에 바다를 제외한 산, 협곡, 강, 호수, 야생동물의 보고가 기본 옵션으로 펼쳐지니 미국인들이 가장 가고 싶은 곳 1위라는 별칭이 당연한 듯하다. 아직도 우리에게 다시 가고 싶은 미국 여행지 리스트 상위에 들어 있다는 것이 그에 대한 반증이리라.

첫 미션은 하늘에 별 따기인 공원 내 숙소 찜하기. 남편의 열정으로 캐니언 롯지(Canyon Lodge) 예약 성공에 마치 아파트 당첨이라도 된 듯 환호성을 질렀던 것은 와이파이도 안 되는 소박한 산장인데도 간헐천과 온천이 펼치는 진기명기 전이 기다리는 옐로스톤이기 때문이리라. 나서는 순간 곳곳에서 솟구치는 연기와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선명한 색깔로 우리의 눈을 유혹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진동하는 특유의 유황 냄새가 코를,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귀를 자극하는데 얼마나 뜨거운 지 만져볼 수 없는 손과 어떤 맛인 지 맛볼 수 없는 입만 할 일이 없어진 듯했다.

기대감에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터키의 파묵칼레와 같은 트레버틴 지형(용천수나 온천수에 의해 퇴적된 석회질의 침전물)으로 유명한 매머드 핫 스피링스(Mammoth Hot Springs). 이곳은 어퍼 테라스와 로우 테라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안전하게 즐길 수 있도록 깔아놓은 보드워크를 따라 가면서 온천 박람회를 감상할 수 있다.

벼가 누렇게 익은 다랑이 논 온천, 순백의 화이트 케이크를 켜켜이 쌓아놓은 웨딩 케이크 온천, 설산의 상고대 온천, 오렌지를 닮은 온천, 잭슨 플록의 그림처럼 추상주의를 내건 온천들까지. 두 번째는 간헐천 중에서 가장 온도가 높은 곳으로 활동량에 따라 수온이 최고 200°C까지 올라간다는 노리스 가이저 베이슨(Norris Geyser Basin). 유명세만큼이나 잦은 사고로 죽는 경우까지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미끄러운 얇은 표면 아래에는 100°C 이상의 온천이 흐르고, 산성도가 높기 때문에 빠지면 시신이 완전히 녹아서 유골도 건질 수 없다고 한다. 실제로 가이저 온도를 재던 오빠가 미끄러져 가이저로 빠졌고 이를 스마트폰으로 찍던 여동생이 신고를 했지만 오빠는 끝내 숨지고만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탐방로를 벗어나지 말라는 경고문이 곳곳에 있고 안전한 보드워크를 설치해 놓은 것이리라.

 이런 위험성에도 매년 수십만 명이 찾는 옐로스톤 핫 플레이스 중 하나가 된 데는 간헐천의 다양한 색깔이 한몫을 한다. 안개가 낀 듯한 몽롱한 분위기에 수증기를 뿜어대는 동적인 가이저가 있는 반면 에메랄드빛, 코발트빛, 주황빛, 우윳빛을 띤 고요한 구도자 같은 정적인 가이저가 있다. 이렇듯 온천이나 간헐천의 색깔이 다양한 이유는 물속의 온도와 그곳에 기생하는 박테리아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라는데 그 뜨거운 곳에서도 박테리아가 산다니 자연의 경이로움에 고개가 숙여질 뿐.

세 번째는 옐로스톤의 하이라이트인 올드 페이스풀 가이저(Old Faithful Geyser). 매일 10분 정도의 오차 범위 내에서 90분에 한 번씩 온천수를 분출하기에 사람도 아닌 간헐천에 ‘믿음직한’이 붙여진 가이저. 94°C의 물이 최고 50m까지 5분 정도 치솟는데 이때 물의 양이 3천만 리터라고 한다. 전날 확인해 둔 시간에 가니 넓은 잔디밭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들뜬 표정으로 앉아서 분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엔 물줄기가 조금 올라가다가 연기만 피우고 내려갔는데 예고된 시간에 다가가자 작은 물줄기를 쏘아 올리더니 이내 물기둥이 폭죽처럼 터진다. 그것도 몇 분 동안. 그 장관을 지켜보는 순간에 들리는 소리는 두 가지뿐. “와우” 하는 함성과 카메라 셔터 소리였다.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알라딘의 지니처럼 보인 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었으리라.

역시 하이라이트의 약속을 지켜 준 올드 페이스풀 가이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네 번째 지역인 미드웨이 가이저 베이슨(Midway Geyser Basin)으로 출발. 미국에서 가장 큰 온천인 그랜드 프리즈매틱 스프링(Grand Prismatic Spring)은 온천이 아닌 호수로 보일 정도로 크기가 어마어마한데 보는 순간 탄성조차 안 나올 정도로 아름답다.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물 주위를 노란색과 주황색 박테리아 띠가 겹겹이 쌓아서 만든 예술 작품 같아서. 옐로스톤을 한 장으로 압축시켜 표현했기에 프로필 사진으로 많이 쓰이는 게 아닌가 싶다. 여기도 트레일을 따라가면서 크고 작은 가이저들과 만난다. 그중 사파이어 풀(Sapphire Pool), 웰 풀(Wall Pool), 모닝글로리 풀(Morning Glory Pool)은 우리가 말하는 풀장처럼 깊이 파여 있어서 날도 더운데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물빛이 싱그러운 푸른빛이다.

바다처럼 큰 호수인 옐로스톤 호수와 야생화의 천국인 드넓은 평원 그리고 작은 가이저들이 쉬지 않고 수증기를 내뿜는 웨스트 썸 가이저 베이슨(West Thumb Geyser Basin)을 지나 옐로스톤 속 그랜드 캐니언에 도착. 상위 폭포가 낙하하는 모습이 가히 장관을 이루는데 다시 하위 폭포는 그 많은 물들을 모아서 움켜쥐고 협곡 사이로 흘려보낸다. 하얀 포말과 가이저의 색깔이 새겨진 협곡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기에 붙여진 이름이 아티스트 포인트(Arist Point).

이처럼 온천과 간헐천 그리고 강과 평원, 폭포와 협곡까지 갖춘 자연 선물세트인 옐로스톤의 디저트는 단연 야생동물들. 차를 타고 가거나 트레일을 걷다가 많은 사람들이 한곳을 보고 있으면 그곳엔 사슴, 바이슨, 여우, 곰이 출현했다는 신호다. 차들이 밀려서 기다리다 보니 한 떼의 바이슨들이 옐로스톤 관광지로 이동 중이었고 간헐천이 찜질방인 양 오수를 즐기는 바이슨, 롯지 앞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사슴 가족들, 관광객을 따라다니는 까마귀 떼와 다람쥐들도 옐로스톤 추억 여행의 스냅 사진으로 남아줘서 고마웠다.

평생 볼 수 있는 간헐천과 온천을 다 보여 준 것도 모자라 그 신비로운 모습이 지구의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졌던 옐로스톤 국립공원. 문득 파묵칼레를 걸었던 추억이 떠오르면서 여기 온천은 눈으로만 봐야 하는 아쉬움도 잠시 보드워크를 따라 걸으며 만나는 무수히 많은 그러나 모양과 색깔이 모두 다른 온천들을 보다 보니 역시 옐로스톤이란 생각이 들었다. 트레일을 걸으며 무수히 만난 가이저들을 눈에 담고 온 저녁에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꾸었다. 사파이어 가이저에서는 인어공주인 듯 수영을 즐기고, 그린 머드 가이저에서는 머드 팩 놀이를 하고, 드래건 가이저에서는 용트림을 들으며 바이슨과 함께 일광욕을 즐기는 꿈을 꿀 수 있는 것도 옐로스톤이라는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리라. 화산 분야의 멀티 플레이어인 옐로스톤을 우리에게 보내 준 자연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겸손하게 우리를 맞아준 옐로스톤 국립공원에게도.


크레이터 레이크가 주인공인 크레이터 레이크 국립공원

오리건 주의 유일한 국립공원인 크레이터 레이크는 이름이 말해주듯 화산 폭발 후 분화구에 물이 고여 만들어진 칼데라호수이다. 최고 수심이 600m에 달하는 미국에서 가장 깊은 호수로 크기는 백두산 천지의 다섯 배인데 그곳이 온통 짙푸른 색이다. 그 이유인 즉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투명한 물이라 태양광선이 내려쬘 때 파장이 긴 붉은색이나 오렌지 색상이 먼저 흡수되고, 다음으로 노란색이 흡수되는데 파장이 짧은 푸른색은 흡수되지 않고 다시 수면 밖으로 반사되기 때문에 호수 전체가 짙은 푸른색이 되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다.

화산은 잿빛이 연상되었는데 크레이터 레이크는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온통 신비로운 푸른색이다. 그래서 호수 주위를 일주하는 림 드라이브((Rim Drive)를 타고 가다 보면 수많은 기암절벽과 방향에 따라 호수가 만들어내는 절경들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가 곳곳에 아주 잘 되어 있다. 이는 크레이터 호수 팬들을 위한 팬 서비스이리라. 절벽 위의 전망대에서는 호수 전경은 물론이고 호수 한가운데 솟아있는 마법사의 섬(Wizard Island)을 볼 수 있다. 이 섬은 대폭발 이후에 2차적인 용암 분출로 생겨났는데 그 모양이 마법사의 모자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마법사가 사랑하는 공주에게 파란 마법을 걸어서 호수로 만든 건 아닐까 동화적 상상을 해본다. 멀리 크루즈를 타고 섬을 도는 사람들이 공주 구출단으로 보일 정도로.

즐거운 상상을 하며 도착한 곳은 캐슬 크레스트 하이킹 코스(Castle Crest Wildflower Garden Trail). 화산지대가 무색할 정도로 여러 가지 야생화들이 길 양옆에서 하늘거리며 펼쳐지는 초원을 보니 시린 눈이 풀리는 듯 했다. 조금 더 가서 만난 비대 폭포(Vidae Falls)는 잠깐의 더위를 식혀 줄 정도의 작고 귀여운 폭포. 선 노치(Sun Notch)에 있는 뷰 포인트에서 보면 물 위를 달리는 돛단배같이 생긴 유령선(Phantom Ship)이 있는데 호수 아래 잠겨 있다가 대폭발 때 모습을 드러낸 신기한 봉우리이다. 너무도 작은 섬이지만 언젠가 물이 마르면 유령선(Phantom Ship)은 가족 봉우리들과 해후하지 않을까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용암과 화산재가 굳어서 형성된 뾰족탑이 모여 있는 계곡을 보기 위해 찾은 피너클 트레일(Pinnacle Trail)에서 Pinnacle은 교회 꼭대기에 있는 첨탑 또는 산봉우리를 의미한다. 화산 활동으로 생긴 뾰족한 첨탑들이 도열하듯 이어져 있는 모습이 마치 하늘의 신에게 화산으로 희생된 모든 것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는 모습처럼 보였다. 계속되는 풍화작용으로 모래들이 아래로 흘러서 계곡 아래는 모래 연기로 자욱한 것 또한 진풍경이었다.

온천이나 간헐천 연기만 본 우리에게는. 평생 이렇게 짙푸른 호수는 다시 보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아쉬움 보다는 확신으로 다가온 건 그만큼 크레이터 호수의 감동이 우리 가슴에 푸른빛 멍으로 남았기 때문이리라. 여행을 하다 보니 멍도 즐거울 때가 있다는 건 자연이 무수한 변신을 통해 우리에게 멋진 추억을 남겨 주기 때문이리라, 크레이터 레이크처럼.

    

캘리포니아의 활화산, 래슨 화산 국립공원(Lassen Volcanic National Park)

래슨 화산 국립공원은 1914년과 15년에 래슨 피크에서 거대한 화산 폭발이 있은 뒤 1921년까지 작은 폭발이 이어진 활화산으로 둘러보고 나면 “어디랑 많이 비슷한데, 어디더라?”라는 말과 동시에“옐로스톤”하면 딩동댕 벨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곳이다.

남편이 활화산이라고 겁을 주기에 조금 긴장하며 처음으로 만난 곳이 설퍼 워크스(Sulphur Works). 커다란 진흙 구덩이에서 진흙 죽이 부글부글 끓으며 유황냄새를 풍기는 것이 마치 “나 활화산인 것 맞지?”하고 인증 샷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그곳을 지나 리지 레이크스 트레일(Ridge Lakes Trail)에 들어서자 우리를 반긴 건 유황을 먹고 자라서인지 뾰족한 침엽수림들과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들 그리고 화산분출로 깎여나가 산 정상이 사발모양으로 바뀐 브로크오프 마운틴(Brokeoff Mt), 이곳의 좌장으로 주황빛에서 푸른색의 화산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래슨 피크(Lassen Peak)의 장엄한 눈빛이 화산 분출의 현장을 오늘은 우리가 걷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듯 했다. 이곳의 핫 플레이스인 범파스 헬 트레일(Bumpass Hell Trail)은 진흙탕이 얼마나 뜨거운 지 자신의 다리를 넣어 심한 화상으로 이를 입증한 범파스(K.V. Bumpass)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니 여기야말로 ‘화산=재난=지옥’이라는 공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리라. 그래서 우리도 지옥 체험을 위해 출발해서 보드워크를 걷다보니 유황냄새가 코를 찌르고 뜨겁게 끓는 진흙 죽 위로 누런 조각들이 고명처럼 떠다니는 모습을 보니 지옥이라 이름 지은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런데 보드워크를 걸으면서 만나는 풍경들은 옐로스톤의 축소판이었는데 옐로스톤의 거대한 바이슨이 있었다면 이곳은 작고 귀여운 다람쥐가 많이 보였다. 파란 온천수를 거울삼아서 “거울아 누가 제일 귀엽니?”라고 묻는 듯한 다람쥐, 관광객을 관광하는 듯한 다람쥐를 보면서 이곳이 지옥 아닌 천국같이 느껴졌다.

그 느낌을 배가시켜 준 것은 가까운 곳에 있는 환상적인 호수들. 이름처럼 아름다운 에메랄드 호수(Emerald Lake)와 호수 표면에 비치는 래슨 피크의 반영 샷으로 유명세를 더한 헬렌 호수(Lake Helen)는 지옥을 탈출한 이에게 주는 시원한 선물과도 같았다. 짙푸른 호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너무도 투명하고 맑아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여독이 씻기는 것 같다. 거기에 푸른 하늘과 파릇파릇한 잎을 단 나무들 그리고 노란 야생화들이 호수 주변을 데커레이션하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이곳이 바로 천국이 아닐까 싶었다.

아직도 부글부글 끓고, 증기를 내뿜고, 으르렁거리며 활화산의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그 안에는 맑은 호수와 푸른 초원을 품고 있는 래슨 화산 국립공원. 옐로스톤을 먼저 봤기에 감흥이 덜할 줄 알았는데 다시 봐도 신기한 건 화산이 주는 강렬하면서 기기묘묘한 모습들 때문이리라. 물리적인 재난을 꿋꿋하게 이겨 내고 자기 복제에 성공한 자연이 쓴 자서전을 읽고 싶다면 래슨 화산 국립공원으로 가보자! 재난을 건너가면 재미가 기다린다고 래슨 피크가 달콤하게 속삭여 줄 테니까.

   

살아있는 지질학의 교과서, 선셋 크레이터 화산 국립천연기념물(Sunset Crater Volcano National Monument)

애리조나 주 플래그스태프 근처에 있는 선셋 크레이터 화산 국립천연기념물은 아기 화산이다. 그 이유는 옐로스톤이 60만 년 전에, 크레이터 레이크는 8천 년 전에 화산 폭발이 이루어진 거에 비하면 1천 년 전 폭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기 화산에 왜 ‘선셋(Sunset)’이 붙었을까 궁금했는데 가서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분석구의 높이가 2451m인데 거의 대부분이 검은 화산재로 덮여 있는데 특이하게도 분석구 윗부분만 저녁놀처럼 오렌지 빛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삭막해 보이는 분석구에게 위로의 의미로 화사한 모자를 씌워준 것이리라. 1920년대 후반 할리우드 영화사가 화산 폭발을 재현하기 위해 이곳 내부에 많은 양의 폭약을 터뜨리려 하자 주민들의 강력한 항의가 일어났고 국립천연기념물 지정으로 이어졌다니 만약 영화를 제작했다면 제목이 <새옹지마>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옛날에는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었는데 잦은 등반 사고로 지금은 모든 등산로가 폐쇄되었고 오로지 라바 플로어 트레일(Lava Flow Trail)만 개방하고 있다. 다른 화산지대보다 찾는 이가 적어서 우리는 오솔길 같은 트레일을 걸으며 마치 지질학자라도 된 듯이 여기저기를 관찰하며 걸었다.

우리가 밟고 있는 검은 흙과 까맣게 타거나 고사한 나무, 화산재에 묻혀서 돌처럼 굳어져버린 규화목, 움푹 패여 동굴이 되거나 파편들이 돌무덤처럼 쌓여있는 용암들까지도 화산이 맺어 준 인연이자 시간이 준 선물이라 여기니 정겹게 다가왔다. 화산 폭발 흔적을 뒤로 한 채 딱딱하게 굳은 검은 용암 옆에서 피어나는 노랗고 붉은 야생화와 풀들 그리고 검은 화산재 속에서도 당당하게 자라는 소나무들, 화산재가 보호색이 되어버린 도마뱀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들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꿋꿋하게 살아 갈 것이다’라고. 이곳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기,승,전,화산!‘이다. 미국의 다른 국립공원처럼 볼거리가 많지 않지만 우리에게 ’재난도 재산이 될 수 있다‘는 화산을 통한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어 보람을 담고 온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이 많은 이들에게 그리고 오래도록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기를 바라며 내려왔다, 진짜 선셋을 바라보면서.    


주상절리의 정석, 데빌스 타워 국립천연기념물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은 데빌스 타워를 찾아가는데 이름만큼이나 무서운 에피소드가 있었다. 지역에서 나는 소고기와 야채로 요리하는 식당에서 아주 맛깔스런 저녁을 먹고 숙소로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끼면서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연인지 식당 앞에는 큰 시계탑이 서 있는 게 아닌가. 우리는 마치 영화 <백투 더 퓨처> 속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그 느낌도 잠시 장대비가 억수로 내리는데 양옆은 불빛 하나 없는 칠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네비는 숲 속을 숙소로 가리키고, 모두가 불안했지만 평정심을 유지하며 오던 길을 다시 가보기도 하다가 주소보다 좀 더 가보았더니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혹시나 하고 갔더니 주인아주머니가 걱정 반 안도 반으로 우리를 맞아 주셨다. 원인은 구글 맵에 잘못된 주소를 시정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안 돼서 이런 난리가 났다는 이야기에 다소 허탈했지만 아주 정갈하게 꾸며진 가정집에서 여독을 씻을 수 있어서 감사한 저녁으로 대체했다. 주인아주머니는 학교 사서고 남편은 목재업으로 출장이 잦아서 에어비앤비를 한다며 자신의 집안 여기저기를 구경시켜주었다. 집안의 테이블보나 쿠션을 만들고 자수나 퀼트도 직접 했다는 말을 들으니 값비싼 물건들로 인테리어를 하는 우리와는 대조적이었다. 내일 아침엔 멋진 아침 식사와 정원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푹 자라며 내려간다. 드디어 아침이 되어 내려가니 식탁에 주인장의 정성으로 조리된 빵과 주스, 오믈렛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름하여 아메리칸 스타일 가정식 백반.

우리는 맛있게 먹고 방명록에 기록을 남기는데 우리가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이지만 한국에서 온 건 처음이라며 오히려 고마움을 표시하는 아주머니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인증 샷을 찍고 데빌스 타워로 출발하는데 하늘은 어젯밤 일을 잊은 듯 쾌청하기만 했다.

데빌스 타워는 미국 최초의 국립기념물로 화산이 폭발하고 나서 분출되지 못하고 화도 속에 잔존하던 마그마가 식어 그 모양 그대로 굳어졌는데 세월에 따른 침식 작용으로 지금의 기이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탑의 높이 260m로 정상부는 평평하나, 측면은 많은 주상절리가 있는데 이에 대한 전설이 있다. 먼 옛날 거대한 곰에게 쫓기게 된 일곱 명의 인디언 소녀들이 데빌스 타워로 도망을 쳤고, 그 안에서 구원의 기도를 했더니 땅이 솟아올라 거대한 바위 탑이 만들어져서 소녀들이 그 바위 탑과 함께 계속 오르게 되자 성난 곰이 소녀들을 쫓는 동안 곰 발톱으로 바위를 긁어서 주위가 지금처럼 부서져 있고 표면에 주상절리가 생겼다는 것이다. 결국 일곱 소녀는 하늘까지 올라가 일곱 개의 작은 별인 플레이아데스 성단(Pleiades Star Cluster)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그 전설을 생각하며 데빌스 타워를 한 바퀴 돌며 걷다보니 불에 타거나 쓰러진 나무들도 있지만 울창한 숲에 다람쥐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면서 악마의 탑이라기보다는 거대하지만 살아있는 듯한 탑의 모습은 데빌스 타워만이 연출할 수 있는 장관이 아닐까 싶다. 진정한 주상절리를 보게 해준 화산과 곰에게 경의를 표하며 데빌스 타워의 안녕을 기원해 본다.    


화산의 빛깔은? 회색 혹은 검은 빛. 화산의 감정은? 분노. 화산을 겪은 자연은? 슬픔과 좌절, 우울함. 그런데 다섯 곳의 화산 지대를 다녀오고 나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뀌었다. 화산의 빛깔은? 노란색, 주황색, 짙푸른 색. 화산의 감정은? 순응, 정열, 자기애. 화산을 겪은 자연은? 위로, 희망, 놀라움으로. 그래서 화산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도 알록달록 화사한 스펙트럼 안에 놀랍다, 멋지다, 신기하다, 아름답다, 맑다, 깨끗하다, 굳세다 등의 감정들을 집어넣어서 화산에 대한 재조명 완료! 수천 년 전에 화산 폭발 당시의 나무들이 거의 화석이 되어 들려주는 그 때 그 순간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는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 지가 가장 궁금했던 여행지. 특히나 옐로스톤의 올드 페이스풀 가이저는 그 때도 믿음직한 가이저의 역할을 충실히 해낼지 혹은 활화산인 래스 화산 국립공원은 분출하지 않고 멋진 자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지, 크레이터 레이크의 짙푸른 색이 더욱 진해지지 않을지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궁금증을 유발하는 곳. 화산은 재난이 아니라 축복까지는 아니지만 많은 이들에게 경이로운 추억을 안겨주는 마법 상자임에는 틀림없다. 눈이 시리게 푸르른 날에나 마음이 우울한 날에는 마법 상자를 열어서 강한 생명력으로 살아남은 꽃들과 나무들이 노래하는 희망가를 듣고 싶다. 화산 여행이 주는 처방전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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