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없이 겨울로 건너간 날씨로 체감온도가 낮다 보니 어느새 따스함이 그리운 요즘이다. 그러던 차에 얼마 전 지인의 집에 갔다가 부산 여행 중 펫 숍에 들렀는데 구석에서 악취를 풍기는 유기견을 보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데리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셔틀랜드 쉽독 중에 특이하게 작은 종이라 분양용으로 데리고 왔는데 같은 크기의 암컷을 구하지 못하자 버려진 불쌍한 강아지. 수천만 원을 벌어다 줄 머니 독(Money Dog)인 줄 알았는데 펫 숍 독(毒)이 되다 보니 제대로 먹이지도 씻기지도 않은 채 방치한 것이다, 이름도 바다라는 뜻의 ‘마로’로 짓고 한 달 동안 열심히 씻기고 병원에 데리고 다녀서인지 우리가 봤을 때는 멀쩡해 보였다. 그런데 그동안 키우던 ‘서머’는 예쁜 짓을 하며 활발한데 비해 우리를 보자 경계의 눈빛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마로’의 모습을 보니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서머’가 ‘마로’를 잘 챙겨주며 함께 잘 놀고 잠도 같이 자니까 주인 내외는 한시름 놓은 기분이라고 했다. 그동안 강아지에 대한 관점이 많이 바뀐 게 사실이다. 인간이 주는 즐거움을 위해 기른다는 인간 중심의 ‘애완견’에서 강아지를 친구로 대우하자는 인간과의 상호 관계를 중시한 ‘반려견’으로의 인식의 전환이 그것이다. 용어의 변화가 진정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온다면, 코로나로 유기 동물 입양이 늘었는데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자 버리는 일이 늘어난다는 기사는 볼 일이 없지 않을까 싶다. 사실 경제 성장으로 우리의 생활 문화에 많은 변화가 생겼고 그중 하나가 ‘펫 문화’의 급성장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성장 뒤에는 유기 동물의 증가라는 암울한 현실이 있고 그 현실은 동물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지하철역에서 만나는 노숙자들, 큰 병이 아닌 노환인데도 요양원에서 집단생활을 하는 노인들, 부모의 사랑은커녕 폭력과 학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아동복지시설에서 생활하는 아이들, 학교 폭력을 당하면서도 보복이 두려워 벙어리 냉가슴을 앓듯 아파트 옥상을 오르내리는 청소년들, 인권이란 단어도 모른 채 염전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장애인 노동자, 불법 체류자라는 약점 때문에 성매매 현장에 내몰린 불법 체류 여성들까지. 그들 모두에게는 보이지 않는 이름표인 ‘유기’가 새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물질적 유기와 정서적 유기로 나눌 수 있겠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그들에게는 ‘마로’의 부산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반려견을 키워 본 적이 없지만 이번에 마주한 작은 유기견 ‘마로’는 내게 많은 질문을 던져 주었다. 마치 내가 던져 준 열빙어 간식에 대한 답을 하듯이. 나와 같은 동물 말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유기되고 있는지 아느냐고. 그리고 그들에게 잠시라도 관심을 갖고 따스한 마음 한 조각 전해 준 적이 있느냐고. 정작 그 대답을 쉽게 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든 생각이 우리 사회는 이미 고도성장을 이루었기에 이제 남은 것은 성숙으로의 양질 전환이리라. 그것을 위해서는 ‘유기’된 동물이나 사람들이 주변의 이해와 배려에 힘입어 서로 마주 보며 염화미소를 지을 수 있기를 바라는데 그것이 너무 큰 욕심일까 생각해 본다. 겨울이 다가오면 낙엽으로 썩어서 자신을 키워준 나무에게 거름이 되어주는 나뭇잎들에게서 성숙을 배운다. ‘마로’에게서 반려의 의미를 배웠듯이. 성장에서 성숙으로, 유기에서 반려로 변화할 수 있는 힘은 ‘마로’를 가슴에 품어 준 지인과 같은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갈 때이리라. 그때가 그리 멀지 않다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