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문화 키워드는 레트로(복고주의)이다. 그래서 드라마나 노포 식당, 옷이나 책, 인테리어 등에서 그 감성을 느낄 수 있다. 내게 레트로는 사우전드 아일랜드 드레싱(Thousand Island Dressing)이다. 80년대 청춘 남녀들의 연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소위 칼질한다는 경양식집에 대한 향수일 것이다. 그때 채 썬 양배추 위에 뿌려져 나온 분홍빛 새콤달콤한 드레싱과 함께. 요즘엔 샐러드드레싱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결정 장애가 일어날 정도이다. 그중 사우전드 아일랜드는 드레싱 역사의 산증인이자 아름답지만 슬픈 사연을 지닌 드레싱으로도 유명하다. 캐나다 킹스턴에 있는 1800 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천 섬(Thousand Islands)을 여행할 때 간 하트 섬의 주인인 조지 볼트는 사랑하는 아내가 아파서 식욕이 떨어지자 요리사에게 맛있는 소스를 개발하게 했는데 그 드레싱이 바로 천 섬에서 따온 사우전드 아일랜드였다. 그러나 아내는 죽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한 볼트는 그 섬을 떠난다. 이렇듯 아름답지만 슬픈 선물인 사우전드 아일랜드 드레싱에 담긴 볼트의 아내 사랑이나 그 옛날 우체부 아저씨에게 미숫가루나 설탕물 한 잔을 타주던 어머니들의 마음이 바로 ‘보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OO 데이들이 많지만 거기에는 자본의 논리만 있을 뿐 정성 어린 마음이 담겨 있지 않아 아쉬움이 컸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12월보다 조금은 여유가 있는 11월에 한 해 동안 고마운 마음, 따스한 사랑을 느낀 대상에게 나만의 ‘보시 데이’를 정해서 ‘생활 속 레트로 보시’를 실천하겠다는 작은 결심을 해 본다. 읽은 책 중 인상 깊었던 문장을 독학으로 배운 캘리그래피로 써서 코로나로 얼굴 보지 못하는 지인들에게 보내기, 코로나를 함께 이겨내고 있는 반려견 방울이에게 직접 만든 면 마스크 씌워주기, 우리 아이가 처음으로 완성한 마분지 그림을 액자에 넣어 걸어주기, 산책길에 주운 낙엽들로 만든 책갈피를 자주 들르는 북 카페에 갖다 주기, 다리를 다쳐 휠체어를 타니 그 소리가 미안하다며 사과를 보내 준 위층 할머니에게 직접 담근 유자청 보내기, 수능을 앞둔 조카에게 옥상달빛의 <수고했어, 오늘도> 노래 선물하기, 꼭 필요한 물건을 기분 좋게 배송해 주는 택배 아저씨의 건강을 걱정해서 총알 배송 한 번 안 하기, 냉동고에 쌓여 있는 아이스 팩을 모아 단골 횟집에 갖다 주기, 매일 안전하게 출퇴근 시켜 준 고마운 애마를 셀프 세차장에서 말끔하게 목욕 시키기, 선물로 받았지만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스카프는 멋지게 코디할 그 누군가를 위해 당근 마켓에 무료로 내놓기 등등, 작지만 기쁜 마음으로, 정성을 들여서 건네는 작은 선물들. 그렇지만 그 작은 선물이 받는 이에게는 사랑의 결실로, 든든한 응원으로, 뿌듯한 보람으로, 은은한 격려로 크게 다가갈 것이다. 자, 그럼 메모장에 내 가슴을 뛰게 하거나 내 마음을 토닥거려 준 대상들을 써 보자. 오랜만에 여유를 가지고 돌아보는 그 순간이 주는 즐거움 또한 내가 나에게 주는 보시라 생각된다. 올해 남은 시간은 줄어들지만 보시 리스트가 늘어날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올 한 해 기쁘고 건강하게 잘 보냈다는 증표 같아서. 내년 이맘때쯤 오늘 쓴 보시 리스트가 당신에게는 또 하나의 뜻깊은 레트로가 되리라. 문득 여러분의 보시 리스트엔 어떤 빛깔과 향기, 감촉이 있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지 무척 궁금한 늦가을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