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나이가 많은 미국 친구 세 분께 드렸던 질문이 있다. 지금의 나이를 되돌아볼 때 인생이 어떻게 느껴지시나요? 대답을 해 준 친구들 중에서 인생이 길게 느껴진다는 분은 한 명도 없었다. 육십이 넘은 친구 두 분은 벌써 60이라니! 인생이 왜 이리 짧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고 하셨고, 여든다섯이 되신 친구분께서도 역시나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지 모르겠다고 대답을 하셨다. 하긴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어 마흔다섯 살이 되었지?
올여름에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했고 할머니 두 분도 찾아뵈었다. 나의 외할머니와 남편의 외할머니. 모두 아흔이 넘으셨고 건강 상태가 좋지 않으시다. 할아버지께서는 모두 돌아가셨다. 코로나라는 뜻하지 않았던 전염병 기간 때문이었을까. 한동안 외출 없이 혼자 지내셨던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었을까. 예전에 뵈었을 때 보다 말수가 아주 적어지셨고 몸은 야위셨으며 사람들을 잘 못 알아보는 치매 증상도 보이셔서 마음이 아팠다.
어렸을 적,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는 언제나 건강하실 것만 같았고 나이 육십 전후에서 늘 머무르실 것만 같았다. 이제 부모님의 연세가 칠십을 훌쩍 넘기셨고 나도 십 년 후면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될 것이다. 아직도 가끔 믿어지지 않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이미 하늘나라에 계신다. 항상 그랬듯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고 흐른다.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가는 우리의 인생은 모두가 똑같다. 모든 이들은 나이가 먹고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간다. 이런 삶이 때론 허무하게 느껴지는 건 나만이 아닐 것 같다.
어차피 모든 사람은 죽는다. 인생이란 마치 아침 이슬과 같은 것일까. 아침에만 볼 수 있는 이슬은 해가 뜨고 나면 언제 있었냐는 듯 금방 사라진다. 언제 어디에 이슬이 있었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것처럼 인간의 삶도 한순간에 불과한 것일까.
조로인생 朝露人生 [아침 조/이슬로/사람 인/날 생]
아침 이슬과 같은 인생이라는 뜻으로, 허무하고 덧없는 인생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조로란 아침 조와 이슬 로가 합쳐진 말로 인생을 아침 이슬에 비유한 사자성어이다. 초로인생(草露人生)이란 말도 같은 뜻으로 쓰인다. 아침에 볼 수 있는 풀잎의 이슬처럼 인생이 허무하고 덧없음을 한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침 이슬과 같은 인생을 허무하지 않게 덧없지 않게 사는 방법은 없을까? 신기하게도 '조로'는 한자에 따라서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조로(朝露)'라고 쓰면 아침 이슬이라는 의미가 되지만 '조로(早老)'라고 쓰면 일찍 늙는다는 말이 된다. '조로인생'을 허무하지 않게 사는 방법은 단 하나, '조로'하지 않는 것! 그것뿐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주변을 보면 조로하는 사람과 조로하지 않는 사람이 확연히 구분될 때가 많다. 한국에서 교사 생활을 할 때도 늘 새로운 도전과 실험을 멈추지 않는 선생님, 학생들과 즐거운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며 재미있게 생활하는 선생님도 있었지만, 어차피 우린 공무원이야. 더 열심히 일해도 월급 더 나오는 거 아니라며 4시만 넘으면 퇴근 시간만 기다리는 선생님, 수업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승진 점수 쌓는 데만 열을 올리는 선생님도 있었다.
미국에서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직업과 인종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알게 되면서 조로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사실 나는 미국에 처음 이민을 와서 한동안 부적응의 시간을 경험했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미국에서도 살아보자,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한국의 조직문화를 한 번은 벗어나 보자라는 생각으로 이민 가방 몇 개만 싸서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사를 왔다. 그러나 현실은 가볍지 않았다. 한국에서 쌓아 왔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마법에라도 걸린 듯 금방 조로해 버렸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조로의 시간은 내게 조로하지 않는 방법을 깨닫게 해 주었다. 전형적인 'ESFJ' 사교적인 외교관형에 속하는 나는 미국에서 좋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또 그 친구들과 매일 만남을 가지며 더 이상 조로하지 않게 되었다. 일주일에 세 번은 미국 친구네 집으로 찾아가거나 줌 미팅을 통해 일상을 나누고, 일주일에 두 번은 미국 친구들과 함께 한국어를 공부하는 시간을 갖는다. 새로 사귄 한국 친구들과도 가끔 식사 모임을 가지며 한국어 수다를 충전해 준다.
미국 시골에서 외교관이 되자! 진짜 외교관은 아니지만 외교관이 뭐 별 건가? 한국에서 사십 년을 살았고 한국 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오래 한 자체가 전문성이고 외교관의 자질이지.라는 생각으로 미국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게 되면서 조로하지 않는 인생이 되었다.
조로인생일지라도 조로하지 말자. 인생은 의외로 길고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