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must be a happy medium somewhere between being totally informed and blissfully unaware.-Doug Larson-
미국에서 산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내년 초면 6년이 된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4살에 약간 못 미쳤던 똘똘이는 어느새 곧 열 살이 된다. 어린이 똘똘이는 한국에서 산 시간보다 미국에서 산 시간이 많아져 버렸다. 마흔 무렵 이사를 온 나와 남편은 이제 마흔 중반을 넘어섰다. 성인 이후의 전체 인생 중에서 5분의 1 이상을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길다면 무지 길 수도 있는 그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다문화, 다인종인 미국에서 살면서 한국 사람, 미국 사람, 세계 각 국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와 가장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유사한 공감대를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은 역시 한국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한국과 미국에서 모두 살아 본 한국 사람들은 '미국이 훨씬 한국보다 좋다' 또는 그 반대로 '한국인은 한국이 제일 좋다' 중에서 한쪽의 생각으로 기우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에 온 지 약 3년쯤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지를 아주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돌아갈까? 말까? 한국 회사를 관두고 온 남편은 당장 할 일이 있는 미국을 선호했고, 나와 똘똘이 또한 미국 생활에 적응을 해가면서 좀 더 살기로 결정을 했기에 우리는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깊게 고민을 할 당시, 나는 미국에서 사는 여러 한국분들께 조언을 구했고, 그분들은 우리들에게 아주 상반되는 조언을 해 주었다.
1. 한국인은 한국에서 살아야지! 미국에서는 평생 이방인이다. 한시라도 젊을 때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라.
2. 미국은 기회의 땅! 굳이 다시 한국으로 왜? 경쟁이 적고 나이 등 조건을 많이 안 따지는 미국에서 살아라.
이런 조언을 듣다가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해 본 사람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 내용이 나뉘는 것이었다. 대학 졸업 후 바로 한국을 떠났거나 한국에서 제대로 직장생활을 안 해 본 분들은 한국이 너무 그립다, 한국이 얼마나 좋은데 왜 안 돌아가냐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반면, 한국에서 수직적이고 경쟁적인 조직생활을 오래 경험해 본 분들은 상대적으로 훨씬 수평적이고 워라밸을 누릴 수 있는 미국에서의 삶이 훨씬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도 미국에 처음 왔을 때, 6개월 정도의 지독한 적응 기간이 지나고 나서는 미국 문화의 좋은 점만 자꾸 눈에 들어왔더랬다. 미국 대도시가 아닌 시골생활만 하고 있기에 사소하게는 앞사람이 문을 잡아주는 매너라든지, 눈만 마주쳐도 하이! 인사해 주고 살짝만 부딪혀도 쏘리! 해주는 문화도 너무 좋게만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윗사람을 웃어른으로 모시지 않는 문화, 칼퇴근은 기본이요, 여름에는 한두 달의 장기 휴가가 가능한 직장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주변을 보면 미국의 대학이나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오후 4~5시면 퇴근을 한다. 점심도 각자 먹고 전체 회식도 없으며 야근은 찾아보기 힘들다. 우연히 마주치고 알게 된 높은 사람들, 예컨대 사장, 대학 총장, 시장, 시의원, 병원장, 디렉터, 교장 등등. 그분들을 대할 때 직위나 호칭 상관없이 마치 친구처럼 이름을 그냥 부를 수 있고, 그분들의 주변에는 의전이나 예우, 접대라는 후광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점들이 나로 하여금 미국 생활이 좋게 느껴지도록 이끌었다.
어느 날, 친하게 지내고 있는 한 미국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 친구는 직장에서 높은 위치에 있으며 나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우정을 쌓고 있는, 나보다 스무 살 가까이 나이가 많은 친구다. 한국의 직장은 너무 관료주의적이고 수직적인데, 미국은 직위나 호칭에 따른 차등과 차별이 많이 느껴지지 않고 캐주얼해서 좋다며 2% 아니, 20% 이상 부족한 영어로 열심히 미국 문화의 좋은 점을 말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 친구는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의견을 냈다.
미국은 어딜 가든 너무 캐주얼하고 위아래가 없는 문화라서 나이 많은 사람이나 윗사람에 대한 예의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조직에서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는 그 미국 친구는 젊은 미국 사람들이 무례할 때가 많다면서 한국의 예의 문화, 위아래가 분명한 문화도 참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아니다, 그 친구도 아니다. 우리 둘은 이야기를 이어나가다가 이런 말을 아냐며 물었다.
Happy medium
모든 문화에는 장단점이 있고, 배워야 할 점과 버려야 할 점 모두 존재하니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적당한 중간,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그 중간 지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음에 쏙 드는 표현이었다. 해피 미디엄! 생각해 보니 미국 생활이 다 좋았던가? 수평적이고 워라밸을 중시하는 미국의 문화는 너무도 좋지만, 부모 형제도 식도락도 없는 미국 생활을 모두 좋다고 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쌓았던 나의 경력과 승진점수도 솔직히 아깝지 않은가. 머릿속으로는 미국이 좋다고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한국을 그리워하는 내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고 당분간 더 살아야겠지만, 한국과 미국 중에서 어느 한쪽이 무조건 좋다고 할 수 없다. 어디에서 살든 간에, 행복한 중간 지점을 잘 찾으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멋진 삶, 만족할 수 있는 삶이지 않을까. 새로운 영어 표현을 알려 준 그 친구 덕분에 하나의 교훈을 얻었다. 한국과 미국 중에서 어느 쪽도 완벽할 수 없고 다 좋을 수 없다. 그 둘은 너무도 다르고 또 거리도 멀지만 그 사이의 중간 지점을 계속 찾고 발견하며 행복을 느끼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