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live Nov 05. 2022

느슨하지만 다양한 친구들

그런 친구들이 좋다.

Friendship isn't a big thing. It's a million little things.


마흔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미국으로 이사를 와서 살게 되면서 내 삶은 많이 변했다. 천년만년 학교에 다니며 직장생활을 할 줄 알았는데 미국에 오니 나의 직장은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매일 볼 수 있는 동료들이 내 주변에서 늘 함께 할 것만 같았는데 미국에 오니 매일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가족이 전부가 되었다. 시간만 내면 언제든 만날 수 있었던 십년지기, 이 십년지기 친구들도 이곳에는 있을 리 만무하다.


직장도, 동료도, 오래된 친구들도 이곳 미국에서는 눈 씻고 찾으래야 찾을 수도 없는 일이 되었다. 반면 이곳에 와서 새롭게 알게 되고, 새롭게 만들게 된 관계가 있다. 바로 친구관계이다. 한국에서도 내 주변에는 항상 비교적 많은 친구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느끼는 친구관계는 그 결이 많이 다른 것 같다. 한국에서 친구라 함은 일단 나이가 비슷해야 친구라 칭하는 게 편했고 오랫동안 정을 주고받으면서 쌓을 수 있는 관계였다.

[친구] 표준 국어 대사전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나이가 비슷하거나
아래인 사람을 낮추거나 친근하게 이르는 말

하지만 미국에서는 친구의 의미가 꽤나 넓다. 나이를 전혀 따지지 않고 잘 아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친구라 한다. 나이 상관없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고, 며칠 만난 사이와도 몇 년간 오래 만난 사이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영어는 존댓말과 반말이 엄격하지 않고 누굴 만나도 직업이나 직책에 상관없이 보통 이름으로만 상대방을 부른다. 누구와도 'You'라고 지칭하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고 말이 잘 통하면 친구라 칭해도 어색하지 않다.

[Friend] Cambridge Dictionary
a person who you know well and who you like a lot,
but who is usually not a member of your family

내 친구라는 개념도 한국과 미국은 많이 다른 듯하다. 한국에서 '내 친구'라고 소개할 수 있는 친구는 전부 다 동갑친구였고 만남이나 소통을 자주 주고받아왔던, 또는 주고받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이에 반해, 미국에서는 '내 친구'라는 말이 때론 아주 가볍게 느껴진다. 누군가 내게 칭찬을 해 주었을 때, You're my friend.라고 하면 고맙다는 의미 또는 반가움이나 칭찬에 대한 화답이 될 수 있다.


때로는 생뚱맞게 친구라는 말이 쓰이기도 한다. 누군가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거나 굳이 누군지 밝힐 필요가 없을 때  친구라고 하면서 말을 시작하는 경우 많다. My friend 또는 One of my friends, A friend of mine 등을 주어로 해서 하고 싶은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친구라는 말 대신 몇 번 만난 사람, 아는 사람(acquaintance) 등을 쓸 수도 있겠지만 '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말을 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미국에서는 한국에서보다 친구의 의미가 가볍고 얕기 때문일까. 둘이 굉장히 친하게 보였지만 알고 보니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경험도 많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가는 줌바 댄스 교실에는 스무 명 이상의 사람들이 매번 모이는데 그중에서 너무도 친해 보였던 두 여성분이 있었다. 한 분은 나이 지긋한 미국 사람, 한 분은 나를 제외하고 유일했던 일본에서 온 아시아 사람이었다. 줌바 수업 때 둘은 항상 옆에 나란히 서서 춤을 추었고 잠시 짬이라도 나면 이야기를 하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 일본 분이 갑자기 안 오시기 시작했다. 이사를 간 것이었다. 하지만 친했던 그 미국 분은 그 소식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분은 한참이 지나서야 내게 혹시 그 친구 소식을 알고 있느냐며 갑자기 안 나와서 섭섭하다는 말을 건넸다. 무척 친한 친구처럼 보였지만 알고 보니 서로의 연락처도 모르는 사이였다. 갈 때마다 내 이름을 불러주며 잘 지냈는지 물어봐 주고 꼭 안아주는 친구들도 있다. 나보다 나이가 열 살에서 스무 살 이상 많은 분들이고 서로의 상세한 근황도 잘 모르지만 우리는 서로를 친구라 한다.


한국의 친구 개념이 바닷물이나 우물처럼 깊고 진한 느낌을 준다면, 미국의 친구 개념은 시냇물이나 연못처럼 얕고 가벼운 느낌을 준다. 한국에서 살 땐 비슷한 경험을 했거나 같은 일을 하는 오랜 친구, 단짝, 베프를 찾는 것이 쉬웠지만 미국에서 사는 지금 내 주변에는 느슨한 관계의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내 나이의 딱 절반인 20대 초반의 미국 친구와도 가끔 보고 싶다며 같이 찻집을 찾고, 내 나이의 거의 두 배이신 80대 중반이 넘은 미국 할머니와도 친구 되어 종종 만다.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을 하나 둘 떠올려 보니 참 다양하다. 인종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며 살아온 환경도 너무 다른 내 친구들. 서로의 삶을 많이 공유하지도 않고 깊숙하게 관여하지도 않지만 마음이 통하고 관심사가 통하는 친구들이 내 주변에 있다. 오랜 친구와 단짝은 이곳에 없지만 대신 그저 편하게 인사할 수 있는 친구, 만나면 반갑고 허그할 수 있는 친구, 가끔 차 한 잔 또는 식사 모임을 할 수 있는 친구들은 많이 생겼다.


느슨하지만 다양한 친구들, 그런 친구들이 좋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