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지구가 태양을 몇 번 돌았는지 가늠조차 안 되는 시간. 그날의 일로 모든 이들이 능력을 잃었다. 그저 한 순간의 일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어떤 능력도 없었던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리고 점차 그들은 자신들에게 능력이 있었던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이제는 조그만 능력이라도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모두가 호들갑을 떠는 세상이 되었다. 능력이 실제로 나타나는 사람도 적었지만, 그 능력이라는 것도 처음의 그것과 비교하면 정말 보잘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작은 능력조차도 신기하고 추앙받기에 충분한 것이라서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도 그런 세상에 태어났다. 그래도 그는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 오는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듣긴 들었었다. 그렇다고 딱히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도 없었다. 능력이 없긴 마찬가지였고, 능력이 있었다는 얘기도 마치 조상중에 누가 큰 벼슬을 했었다는 것처럼 지금은 아무 영향이 없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이제는 그의 부모님이 가끔 하는 ‘능력’이 있던 시절의 이야기도 감흥이 없었다. 만약 있었다 해도 이제 와서 사라진 능력이 다시 돌아올 것도 아니고, 그냥 옛날이야기 아닌가?
민준은 오늘도 무기력하게 잠에서 깼다. 밤에는 생각이 많아지고 잠은 늦게 들었다. 그러다가 새벽이 되면 해가 길어진 탓에 아침이 너무 빨리 찾아왔다. 겨우 잠을 좀 잔다 싶으면 아침 햇살에 눈이 찌푸려져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늘 잠이 너무 부족하게 느껴졌다.
“으으으. 커피!”
캡슐로 내린 커피를 빈 속에 반 컵쯤 들이켜지 않으면 아침을 제대로 시작할 수가 없었다. 카페인이 작용을 하는 데는 30분 정도 걸린다는데, 커피가 들어가자마자 잠이 깨는 것 같은 건 이상한 일이었다. 인간의 몸은 정말 신기한 부분이 많았다. 그는 50도로 맞춰 놓은 물에 에스프레소를 섞어마셨다. 그 정도가 딱 뜨겁지도 차지도 않았다. 서서 커피를 마시고 나면 그의 하루의 시작이었다.
지하철을 타러 나가는 길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이제 날씨도 더워지기 시작해서 햇볕을 몸으로 받는 게 부담스러웠다. 평소에 지하철을 탈 일이 별로 없는 민준에겐 더욱 그랬다. 보통 사람들은 다 이렇게 출퇴근하고 햇살 받고 사는데, 하는 생각을 하며 그는 자신이 좀 외지인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외계인까지는 아니고.
‘이제 횡단보도만 건너면 지하철 역이다. 그럼 그늘이 있다.’
민준은 그 생각을 하며 숨을 골랐다. 빨간색이 초록색으로 바뀌기만 하면 속도를 내서 이 대로를 건너고, 시원한 땅 속으로 들어가리라.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는 순간, 힘차게 팔을 휘저으며 걷기 시작한 그의 손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탓일까? 들고 있던 휴대폰 모서리가 그의 바지 주머니에 걸리는 게 느껴졌다. 손에서 휴대폰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안돼. 22개월 할부로 산 신형 휴대폰인데. 게다가 아직 주문한 보호케이스가 배송 오지 않아서 날 것 그대로의 상태란 말이다. 아, 조심했어야 했는데. 왜 오늘 지하철을 타는 일을 만들었을까. 왜 그냥 아무 케이스라도 씌우지 않았던 걸까. 그 짧은 순간에 온갖 후회의 생각들이 민준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때, 날고 있는 휴대폰과 겹쳐 민준의 시야 왼쪽으로 뭔가가 보였다. 킥보드를 타고 있는 꼬마아이였다. 그리고 보행신호가 들어온 지 모르고 빠르게 우회전을 하는 흰색 승용차가 보인다.
‘이 짧은 순간에 왜 이런 게 다 보이지? 저 속도면 브레이크를 밟아도 저 아이를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저 차바퀴의 경로와 휴대폰의 낙하 위치라면 곧 내 휴대폰은 차에 밟혀 가루가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저 아이의 뒷덜미를 움켜잡거나, 내 휴대폰을 최소한 차가 지나갈 자리 안쪽으로 떨어지도록 건드리는 것뿐.’
찰나였지만 민준은 정말 짜증이 났다. 그리고 이걸 잠시나마 고민하고 있는 자신에게도 짜증이 났다. 그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눈을 잠시 질끈 감았다.
윙…
조용하다. 뭐지? 차가 멈춘 건가? 사고가 난 건가?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민준은 질끈 감았던 눈을 조심스레 떴다. 눈앞에 펼쳐진 건.. 뭐지? 도대체 이 광경은 뭐지?
그는 그 순간에도 이것은, 직접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을 보고 있는 자신조차도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자신이 죽은 건지 살아있는 건지 확신이 안 섰기 때문이었다. 민준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흡사 피자 조각 모양으로 잘린 그 ‘무엇’이었다. 본능적으로 그게 어떤 차원 혹은 시간의 조각이라고 여겨졌다. 조각 하나하나는 마치 크리스털처럼 차갑고 날카로워 보였고 각각이 예리하게 잘린 것처럼 생겨있었으며 그것 사이사이에는 빛이 나오는 틈이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조각 하나하나에 보이는 것은, 바로 하나하나의 자신의 모습이었다. 민준은 그 조각을 살펴봤다. 하나의 시간 조각에 보이는 모습은, 그가 킥보드를 탄 아이의 옷을 움켜쥐고 있었고 아이가 탔던 킥보드는 횡단보도의 2/3까지 밀고 들어온 승용차 밑으로 구겨져 들어갔다. 킥보드의 바퀴는 분리되어 6차선 대로를 가로질러 굴러가고 있었다. 그의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차바퀴 밑에 깔려있을 것이었다. 놀라서 넘어진 아주머니와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보인다. 다행히 다친 사람이 없어 보인다. 민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다음 시간의 조각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조각의 사이사이에는 마치 틈과 같이 보이는데 길고 번쩍이는 섬광이 있어 눈을 뜨고 바라보기가 힘이 들었다.
다른 조각으로 보이는 광경은 놀라웠다. 아니, 끔찍했다. 아까의 그가 예견했던 그 사고였다. 차는 신호가 바뀌자마자 횡단보도로 뛰어드는 아이의 킥보드를 피하지 못했다. 당한 사람도, 일으킨 사람도, 그리고 지켜본 모든 사람에게도 끔찍한 일이었다. 민준은 그 광경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차마 오래 바라볼 수 없었다. 분명 사고가 일어날 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사고를 막지 못한 거지? 왜 막지 않은 거지?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질문이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계속 마음속으로 그 질문을 했다.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고,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는 곧 소리라도 지를 것 같아서 더 이상 그 모습을 바라볼 수 없었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용기를 내 눈을 떠 다른 조각들을 보려고 애썼다.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수많은 시간과 사건의 조각들이 조각의 뒤로 이어져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보석의 결정처럼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의 사이에는 섬광이 비치는 틈이 벌어져있었다. 그는 곧 그것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조각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그 눈부신 섬광은 바로 그의 ‘선택’이었다.
너무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는 이것이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분명히 알 것 같았다. 왜 갑자기 눈앞에 이런 것들이 보이는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든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려고 했다. 민준은 자신이 했어야 했고, 하고자 하는 선택의 조각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빨려 들어가듯 시야가 흔들리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괜찮아요?”
차에서 내린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민준은 자신의 손에 잡혀있는 꼬마아이가 캑캑대는 소리에 깜짝 놀라 손의 힘을 풀었다. 아이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놀라서 얼이 빠진듯한 얼굴로 자신의 구겨지고 부서진 킥보드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민준을 한 번 쳐다봤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씩씩하게 버티는 게 보였다.
“괜찮니? 안 다쳤어? 이 삼촌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놀라 넘어졌던 아주머니가 일어나서 아이의 바지를 털어주며 물었다. 이미 아이가 괜찮은 걸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걱정하고 민준을 격려해 주고 자리를 떠났다. 스마트폰을 들이대고 현장과 그를 찍는 학생들도 많았다. 사진에 찍히고 싶진 않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이 사람들은 그가, 죽거나 혹은 다칠 뻔한 아이를 구한 것만 알지 그 순간 그가 본 것은 알지 못한다. 이해할 수도 없고 믿지도 못할 거다.
‘도대체 뭐였을까? 왜 갑자기 그런 걸 경험하게 된 걸까? 어떤 이유로 나한테 그게 보이게 된 걸까? 이걸 누구한테 얘기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