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
아침 청소를 마친 윤미는 잠시 손을 허리에 대고 상체를 쭉 폈다. 카페에 손님들이 오기 시작하려면 약 30분 정도는 남았다. 사장님은 오픈 한 시간 전에 올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그녀는 이렇게 일찌감치 청소를 마치고 잠시 갖는 여유가 좋았다. 음악도 틀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하루 종일 음악을 들어야 하는 그녀로선, 사실은 음악이 없는 상태에서의 적당한 소음이 음악보다 듣기 좋을 때도 많았다. 윤미는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한 카페에 존재하는 소음이라곤 돌아가는 냉장고 모터 소리뿐이었다. 멀리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와 멀리 떨어진 사람들의 대화소리가 섞여 적당히 듣기 좋은 소음을 만들고 있었다. 잠시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딸랑, 하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픈 시간이었다. 벌떡 일어나 카페 출입문을 바라봤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직장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였다. 어서 오세요, 인사를 하는 윤미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젠틀한 미소로 그녀에게 화답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눈치 없이 너무 오픈하자마자 들어왔나요?"
"아니에요. 들어오셔도 돼요. 음료 주문 도와드릴까요?"
남자는 이번에도 매너 좋아 보이는 미소를 머금고 입모양으로만 '네' 하는 모양을 한 뒤,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윤미는 첫 손님이 매너가 좋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첫 손님부터 단체라거나 소위 '진상' 손님이면 그날은 하루의 절반도 지나기 전에 에너지가 고갈되곤 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비교적 만들기도 쉬운 라테를 주문하고 저만치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깔끔하게 생긴 인상과 어울리는 옷차림, 거기에 어울리는 매너를 보여주는 남자였다. 음료를 다 만든 윤미는 조심스레 그것을 쟁반에 올려놓고 남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음료가 다 준비된 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걸어오는 남자의 표정을 본 윤미는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남자의 눈가와 입가에는 젠틀한 미소가 있는데, 섬뜩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남자의 얼굴을 분명하게 보기 위해 눈에 살짝 힘을 주었다.
“눈이 좀 피로해 보이시네요. 스마트폰 너무 많이 보시나 본데요?”
누가 들어도 그저 적당한 선에서의 농담이었다. 편안한 거리, 부담 없는 목소리, 행동까지 거슬릴 게 없어 보였다. 그런데 윤미는 아까보다 한층 더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가 봐요. 하하.”
그녀는 이상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써 웃어 보였다. 남자도 윤미의 웃음에 미소로 반응했다. 그때였다. 윤미는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로 음료를 집어든 그 남자의 등 뒤에서 뭔가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남자가 입고 있는 옷과 같아 보이지만 그보다 한층 더 어두운 톤의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의 형태가 남자의 등 뒤로 나타난 것이었다. 고개를 다 들어 올린 그 형체의 얼굴을 보고 윤미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눈앞에서 음료를 들고 있는 미소 띤 남자의 얼굴과는 전혀 다른 그 남자의 모습이었다. 젠틀한 미소는 싹 사라진, 차갑다 못해 오싹하기까지 한 남자의 표정이 윤미를 쏘아보고 있었다. 윤미는 몸도 얼굴도 움직일 수 없이 얼어붙어버렸다.
“어디 안 좋으세요? 얼굴이 불편해 보여요.”
앞에 있는 남자는 젠틀한 미소를, 뒤에 선 형체는 차갑고 냉소적인 표정으로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미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일단 입을 뗐다.
“아, 멍.. 때리고 있었어요. 죄송요.”
“맹하게 생긴 알바년이 일도 느리네 짜증 나게.”
윤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의 그 젠틀한 남자가 내뱉은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눈만 깜빡거리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서있는 윤미에게 남자가 다시 말했다.
“괜찮으신 거 맞죠? 좀 쉬셔야 할 것 같은데.”
윤미는 차마 그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다시 본다면 정말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았다. 윤미가 고개를 들지 않고 바닥만 보고 있자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돌아서 어색하게 나가려고 했다. 그때 그 남자의 또 다른 모습이 고개를 돌려 윤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야. 내가 속으로 한 얘길 듣기라도 한 것처럼 구네. 아이씨 놀랐잖아.”
윤미는 남자가 완전히 나갈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땡그랑 하는 소리가 몇 번 나며 문이 완전히 닫히자 그제야 윤미는 가쁜 숨을 몰아서 쉬었다. 도대체 저 남자는 뭐지. 사람이긴 한 건가?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안정이 되었다. 하지만 손님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윤미는 다시 숨이 멎을 뻔했다. 아까의 그 남자가 문제가 아니었다. 카페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의 뒤에 또 다른, 아니 같은 사람의 또 다른 모습이 하나씩 윤미의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겉모습과는 정반대로 사악한, 혹은 소심한, 이기적인 그 존재들의 모습을 보면서 결국 윤미는 알게 되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그걸 보고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라는 것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윤미에게 지금 그들 내면의 진짜 모습을 보이고, 그들의 말이 들리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