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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by 삼오십

한 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외롭게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멀리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가난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는 먹고 입는 것에서 큰 부족함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죠. 하지만 그는 언젠가 오실 거라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외로움을 간직한 채 살아야만 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던 기억은 아주 어릴 때의 흐릿하게 반짝이는 기억뿐이지만, 그 기억으로 인해서 적어도 자신이 아버지에게 사랑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곧 오실 것만 같았던 아버지는 금방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동안 그는 점차 자랐고, 아버지와의 좋은 기억들이 무뎌지는 대신 다른 것들로 그 감정의 빈자리를 메워가고 있었습니다. 혼자서 아버지를 기다리며 아버지가 돌아오면 함께 할 것들을 기대하던 그가, 이제는 혼자인 게 익숙해지고 혼자 새로운 재미를 찾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점차 아버지의 존재가 우주 속 천체처럼 어느 순간 흐릿하게 반짝이기도 했다가 구름에 가리고도 하는 그런 정도로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가끔은 아버지를 생각하긴 했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놀던 길가에 가득 피어있던 그 코스모스를 보게 되면 불현듯 그 장면 속의 어린 자신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어 그 기억을 날려버리곤 하는 그였습니다. 그 생각을 오래 하게 되면 왜인지 모를 감정들이 마구 솟아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움, 원망, 미안함, 죄책감등의 감정이 한꺼번에 뒤섞여서 자신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게 그는 싫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의 존재를 기억하며 또 잊어갔습니다.


이제는 어른이 된 남자는 어느새 아버지와의 기억을 거의 잊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아도 자신은 꿋꿋이 잘 컸고 살아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간혹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아버지가 없었어도 그는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으며, 그렇게 조금씩 성장해 가는 자신을 보며 작은 뿌듯함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아버지의 존재를 마음 한구석에 두고 살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자신의 곁에 없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아버지가 돌아온다고 믿었던 사실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정말 나와 함께 있었던 게 맞을까. 누군가에게 들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나와의 기억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내 그럴 리는 없다며 아버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면 그는 우울해지는 것을 떨치기 위해 다른 일로 생각을 전환하곤 했습니다.


그는 이제 아버지를 거의 잊어버렸습니다. 아버지를 생각해도 더 이상 우울하지 않았고 덤덤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문득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지만, 자신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거의 사라져 있었습니다. 아버지라는 게 만약 한 폭의 그림이라면, 이제 그 그림은 그저 자신이 새로운 도화지에 처음 그리는 그림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그는 어느 날 아이가 그린 그림을 발견했습니다. 그 그림은 한 눈에도 무엇을 그린 건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였습니다. 그 순간 남자의 마음에 미묘한 균열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남자는 더 이상 길에서 코스모스를 보아도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었습니다. 코스모스와 아버지를 동일시했던 건 아주 오래 전의 일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그린 코스모스 그림에서 남자는 이제껏 잊고 지냈던 감정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는 갑자기 마음 어딘가를 긁혀서 피와 진물이 나오는 것처럼 고통이 느껴졌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굳어져온 마음이라 작은 긁힘으로는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었는데, 이 고통은 너무나 강렬했습니다. 눈물이 왈칵 솟아올라왔습니다. 아이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넘쳐서 흐르기 시작했고 이내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올 거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곳을 떠나 멀리 왔지만, 어쩌면 아버지는 그곳에 이미 돌아왔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아니,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돌아온다고 약속했었습니다. 남자는 코스모스가 피면 다시 돌아온다고 말했던 아버지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이제 돌아가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남자는 결심했습니다.


코스모스가 피었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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